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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신무용 개척자/배구자 재평가/미래춤학회 26일 학술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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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신무용 개척자/배구자 재평가/미래춤학회 26일 학술모임

입력
1994.0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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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극 창조·극장 설립등 일제때 대활약/무용사 정당한위상 찾아주기 한국미래 춤학회(회장 송수남)는 26일 문예진흥원강당에서 배구자씨를 집중 탐색하는 학술모임을 개최한다. 배구자씨(89·미국거주)는 북으로 간 최승희와 함께 개화기 신무용의 개척자였으나 우리 무용사에서 외면당해 온 기이한 인물이다. 이 행사는 그동안 풍문으로만 전해지던 그를 당시의 자료와 증언을 토대로 객관적으로 살펴봄으로써 무용사에서 그의 위치를 바로잡아 주는 계기가 될것으로 보인다.

 파란만장한 춤의 인생을 살아 온 배씨는 오늘 우리에겐 베일에 쌓인 무용가이다. 그가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의 정부였던 배정자의 조카라거나 혹은 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라는 식의 이야기만이 전해질 뿐이다. 그의 활동시기와 행적도 확실하지 않다. 

 학술모임에 발제를 맡은 유민영교수(단국대)는 배씨의 삶의 흔적을 명쾌하게 재구성해 주목받고 있다. 그는 매일신보 등 당시의 신문과 관련자료를 검토해 배씨의 참모습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으며 우리 무용사에서 그의 족적을 새롭게 확인하고 있다. 

 유교수는 배씨를 『암울한 식민지시대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면서 최초로 신무용을 소개했고 민족무용의 기초를 닦았던 선구자이다. 그는 또 악극이라는 새로운 연극장르를 만들었으며 동양극장을 세워 이땅에 대중문화가 꽃피울 수 있게 한 예술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유교수에 의하면 배씨는 배정자의 오빠인 배석태의 딸로 태어났다. 그는 11세때 당시 일본의 대표적인 곡예단으로 무용, 음악, 곡예, 연극, 가무 등 다양한 장르의 무대예술에서 평가를 받던 덴가쓰자(천승좌)에 들어가 철저한 교육을 받았다. 

 배씨는 여러차례 덴가쓰자의 일원으로 고국무대에 올라 신무용을 선보였으며 그에게 매혹된 수많은 젊은이들이 날마다 편지를 보낼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배씨가 덴가쓰자를 탈출한것이 21세때였다. 

 한국인으로서 우리나라 예술계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그는 미국유학을 결심하고 1928년 「고별음악무용회」를 갖는다. 이 때 배씨는 우리 무용사에서 재평가 받아 마땅한 창작민속무용 「아리랑」을 공연했다.

 그는 미국으로 가는 대신 결혼하고 본격적인 국내활동을 벌였다. 1929년엔 서양무용을 이땅에 전파하는 동시에 전통무용을 계승·발전시킨다는 목적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무용연구소를 개설했다. 

 1935년 연극전문극장인 동양극장을 세웠을 무렵이 그의 전성기인 셈이다. 그러던 중 남편과 사별하고 동양극장에서 손을 뗀 후 대중으로부터 사라졌다. 77년 동생 배한라씨(작고)가 「춤」지에 기고한 글에 의하면 배씨는 47년 일본계 미국인과 결혼해 도미했으며 현재는 미국 샌타바바라에서 살고 있다.

 선구적 예술가로서 무용계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배씨에 대한 재평가는 우리 무용사의 공백을 메워줄것으로 보인다.【김철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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