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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견인 수출공단 건설 주역/타계한 이원만 코오롱창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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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견인 수출공단 건설 주역/타계한 이원만 코오롱창업주

입력
1994.0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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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론 첫도입 화섬사시대 열어 14일 타계한 코오롱그룹의 창업주 오운 이원만명예회장은 우리나라 섬유산업발전의 기수이자 수출산업공단 건설의 산파였다.

 1904년 경북 영일군 신광면 우각리에서 이황선생의 스승이자 5현의 한분이었던 회제 이언적선생의 15대손으로 태어난 이명예회장은 16세때 부친의 사망으로 6년제보통학교를 끝으로 학문을 포기하고 생업에 나서 오늘날 코오롱그룹의 토대를 마련했다. 특히 5·16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수출입국과 공업단지조성의 필요성을 강조, 구로공단과 구미공단을 조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명예회장이 처음 손댄 사업은 모자제조업. 경북 산림조합 기수보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나 마음에 차지않아 29세때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광고모자 전문제조업체인 「욱공예(주)」를 설립해 작은 성공을 거둔뒤 해방되던 해인 1945년 대구에 당시 큰 인기를 얻던 뉴똥치마감을 생산하는 경북기업(주)을 세웠다.

 이어 51년에 삼경물산을 설립, 「기적의 섬유」나일론원사를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하고 57년에는 한국나이롱(주)을 세워 직접 나일론생산에 나섰다. 이로써 우리나라에 화학섬유시대가 열리고 코오롱그룹의 토대가 마련됐다. 

 5·16이후 이명예회장은 틈나는대로 수출을 위한 공단조성을 주장, 63년 한국수출산업공단창립위 위원장을 맡아 구로공단과 구미공단을 조성해 「수출의 기수」역할을 해냈다. 이 공로로 대통령상과 은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6,7대 국회의원을 역임, 경제계는 물론 정계에서도 폭넓은 활동을 했다.【방민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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