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 47종 2백여점 90년만에 귀국/하층생활불구 기금모금 동참/국민회 설립 일규탄시위… 임정과 연락 국운이 기울던 1905년 조국을 떠나 멕시코로 이민간 한인들이 참담한 생활 속에서도 독립을 위해 헌신적인 활동을 펼쳤던 사료들이 대거 발굴됐다.
노예나 다름 없던 환경 속에서 독립을 향한 열망과 애국심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 감동적인 자료들은 대부분 처음 공개되는것이다.
이 47종 2백여점의 자료들은 안기부가 80년대부터 멕시코시티 한인사회에서 수집한 후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박영석)에 기증함으로써 90년만에 귀국하게 됐다. 자료 대부분은 김익주씨(1873∼1955)의 손자인 아벨 김씨(54·사업)가 소장해 오던것이다.
1905년 영국인과 일본인 꾐에 빠져 4년간의 계약으로 멕시코로 떠난 1천여명의 한인들은 토굴과 같은 좁은 우리에 갇혀 살며 매질 속에서 하루 16시간씩의 중노동을 하고 받는 돈은 일당 1달러도 되지 않았다.
지옥같은 생활 속에서도 1909년 5월 한인들은 국민회 메리다 지방회를 설립하고 일본을 규탄하는 시가행진을 비롯하여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귀국한 사료 중 가장 눈길을 끄는것은 독립기금 모금액과 기부자의 이름을 적은 경리장부이다. 장부는 40년 이후의것으로 이민초기의 농노생활을 벗어난 시기이긴 하지만 이때도 가정부나 하인등 대부분 천한 일을 하면서 정기적으로 조국독립을 위한 자금을 모아온것을 보여준다.
기부액은 적게는 50센트에서 많게는 50달러인데 보통 5달러 정도를 냈다. 이와 함께 국치일인 8월29일과 3·1절 행사를 위해 기부했던 기부자와 액수가 적힌 금전출납부도 들어 있다.
또 1919년 4월 임시정부수립을 위한 국민대회 개최 취긍서와 국민대회 선포문, 대한인 국민회 총회장 명의로 된 김익주씨에 대한 독립의연금 모금위원 서임장등은 당시 임시정부와 멕시코 한인회가 수시로 긴밀한 연락을 취했고 체계적으로 독립운동이 이루어졌음을 알려준다.
1921년 상하이임시정부에 보낸 독립공채자금 40원짜리 영수증 2장과 임시정부발행 인구세 고지서 및 영수증, 대한인 국민총회 의무금 납부증서와 적십자회비 송금수표 5원짜리, 상하이 인성소학교 후원회비 모금서한 등도 포함되어 있다.
낡은 태극기, 독립운동 선언서 필사본, 안창호 윤봉길 이봉창 선생의 사진, 멕시코 시티 한인 청년회가등도 돌아왔다.
<금수강산 이별코 만리타향 손되니 고국생각 맘에 간절하고나… 튀인들에 곱게 핀 쟝미화가 되여셔 설음 만은 땅에 깃쁨을 주고 사막에서 소스는 맑은 샘물이 되여서 사션에 선 민족 생명을 주세> (「멕시코 시티 한인 청년회가」중에서) 금수강산 이별코>
박위원장은 『이민사 사료 가운데 원본상태로 발견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유카탄 반도 메리다로 간 멕시코 한인은 지금은 생활이 안정된 편이지만, 그들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자료부족으로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서 사료적 가치가 더없이 크다』고 말했다.【최진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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