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들 모험심 키워야”/미지세계도전 인류발전의 힘/기록보다 난관극복 의지중요/「등산정신」 생활화되면 건강한 사회 큰 기여◇대담=임철순기획취재부장
남극점 정복으로 한국은 탐험열강의 지위에 올랐다. 탐험과 개척의 정신은 민족저력을 가늠하는 잣대라는 측면에서 자부심을 가질만 하다. 그러나 탐험의 성과가 민족의 총체적 역량으로 발현되려면 사회 전체에 탐험과 개척의 정신이 확산돼야 한다. 77한국에베레스트등반대장이었던 원로산악인 김영도씨(70·한국등산연구소장)를 만나 탐험의 시대사적 의미와 우리의 과제를 들어보았다.
―등산계의 원로로서 남극점 정복에 대한 소감을 말씀해주십시오.
▲큰 성과입니다. 산악인의 한 사람으로서 환영합니다. 특히 저는 감회가 남다른 바 있습니다. 저도 77년 에베레스트등정이후 남극정복의 꿈을 꾸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에베레스트등정 환영간담회당시 고박정희대통령은 저를 따로 불러 한국인이 남극대륙에 태극기를 꽂아야 한다고 말했었습니다. 남극대륙의 장래성을 꿰뚫는 탁견이었지요. 공부한 것도 없고 여건도 여의치 않아 잘 모르겠다고 했지만 그 이후 남극얘기는 제 산악인생을 사로잡는 하나의 화두(화두)가 된 셈입니다.
―남극점 정복의 탐험사적 의의는 무엇이겠습니까.
▲남극탐험에는 놀라운 기록들이 많습니다. 첫 도전은 1910년 영국의 샤클톤대장일행이었으나 극점을 눈앞에 두고 강풍과 폭설로 좌절했습니다. 이후 유명한 스콧과 아문센 두 거물의 경쟁이 극지정복의 길을 한동안 독점했습니다. 85년 로버트 스완대의 남극점정복도 인상적입니다. 2백㎏이 넘는 개인장비를 지고 걸어간 이들은 70일만에 극점에 도착했지요. 무전기 없이 중간보급도 거부, 무보급 무접촉이라는 기록을 세웠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스콧일행이 사라졌던 죽음의 항로를 되밟아갔다는 점입니다. 히말라야고봉을 모두 정복한 라인홀드 메스너는 89년에 빈슨 매시프산에서 극점을 통과, 맥머드기지로 92일만에 귀환함으로써 남극대륙횡단이라는 특이한 기록을 세웠습니다.
이런 엄청난 기록들과 견주어 우리의 기록도 결코 왜소하지 않습니다. 선진국가들이 독점해온 탐험의 역사속에 당당하게 끼여든 것입니다.
―한국을 탐험강대국이 되게 한 원동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경제발전과 장비·탐험기법의 발달인가요.
▲사회안정이나 풍요한 경제가 요인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민족이 지닌 기백과 정신, 즉 민족혼을 중시하고 있습니다. 등산은 원래 서구적 개념의 발상이었습니다. 알프스 도전에서 시작해 5대양 6대주의 고산준봉에 올랐던 사람들은 모두 백인이었습니다. 한국과 일본이 그 뒤를 따라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저력은 만만치 않습니다. 에베레스트등정은 세계 8번째이며 파키스탄의 바인타브락(6,969m) 초등기록도 있습니다. 8m천 이상의 세계최고봉을 대부분 정복한 것도 세계등반사에 드문 일입니다.
―남극점 정복으로 한국인은 전세계 극지·오지를 섭렵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목표라면 어디가 있을까요.
▲등산만이 탐험의 요체는 아닙니다. 요트로 태평양을 횡단하거나 대한해협을 도영하고 자동차로 대륙을 횡단하는 일 모두가 탐험의 범주에 속하는 것입니다. 다만 민족의 에너지가 어떤 양상으로 발산되는가의 문제겠지요.
―인간을 모험과 탐험으로 이끄는 동인은 무엇이겠습니까.
▲등산의 시초는 1786년 8월7일 몽블랑정복이라고 많은 문헌들이 밝히고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날이 준엄한 대자연에 대한 도전에서 인류가 성공한 날이며 현대과학기술문명이 시작된 날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인간잠재력의 위대함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에 있고 도전의 열정은 문명을 창조하는 힘과 동일합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에서부터 문명창조의 원동력이 발원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느끼든 느끼지 않든 위험에 도전해 보려는 충동을 갖고 있습니다. 일상생활의 모든 일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형식은 달라도 모험심을 필요로 합니다. 현대에 들어 학식과 기술, 경제력(돈)이 인간사를 좌우하는 3가지 요소로 등장했지만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는 힘이라고 믿습니다. 이런 힘은 대자연과 부딪치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신은 인간을 만들고 인간은 기계를 만들었다지만 현대에 들어서면서 신은 죽었고 인간은 기계에 예속되기 시작했습니다. 기계가 인간의 역할과 기능을 대신해주는 시대에는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는 정신이 더욱 절실합니다.
―최근 현대적인 장비에 의존하지 않고 체력과 의지만으로 자연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은 문명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면서 대자연에 대한 순수한 도전의지로 회귀하려는 현상이 아니겠습니까.
▲측량장비등 각종 장비의 개발로 인해 등산은 점차 유쾌하고 안전한 레저로 변해가고 있는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등산의 묘미는 안락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위험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충족감과 희열에 있습니다.
다행히 최근 태백산맥을 밑에서부터 훑는 백두대간종단, 지리산종단등의 등반형식이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붐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 젊은이들의 순수성과 맑고 굳센 정신을 엿볼 수 있는 흐뭇한 현상이지요.
―그러나 모든 것이 곧바로 상업화하는 시대에 순수한 알피니즘은 설 자리가 없어 보이는데요.
▲제가 등산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무한한 세계에 내던져진 인간존재의 나약함, 고독감입니다. 극한상황에서 대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고 그 철학적 비전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외국의 탐험기에서도 가장 자주 나오는 게 IMMENSITY(무한성)라는 단어입니다. 장대한 섭리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왜소한가를 돌이키는 것이지요. 등산은 인간을 성숙하게 만들어주고 인생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게 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기록을 세우고 태극기를 꽂으려고 달려가는 풍토는 지양돼야 합니다. 요란하게 부추기는 저널리즘에도 책임이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태극기를 내세우지 않아도 좋으니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성숙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국제사회의 어른이 되어야 하며 어른으로 대접받아야 합니다.
―요즘 활동을 소개해주십시오.
▲등산학교나 기업체 강의를 통해 진취적인 정신고양이나 극기정신 고취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간간이 외국의 등산서적을 번역한게 7권 정도 됩니다.
―후배등산가나 모험가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을 해주시죠.
▲기록을 앞세우지 말고 난관에 부딪쳐 극복해 보겠다는 본연의 자세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자세는 등산정신의 생활화로 연결될 것입니다. 등산가들은 높이만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등산정신을 전파하는 사명의식을 가졌으면 합니다. 특히 40대의 사망률이 세계최고라는 현실을 감안할 때 등산은 우리 사회의 중추세대인 30∼50대를 건강하고 건전하게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이여 모험심을 길러라. 높고 어렵고 위험한 것에 도전하는 민족은 강하다』 이런 말을 하고 싶습니다. 【기록=이재열기자】
□약력
▲1924년 평양출생
▲서울대철학과 졸업
▲육군장교(대위 예편)
▲육사교수·서울성동고교사
▲공화당사무차장·기조실장
▲9대 국회의원
▲대한산악연맹회장
▲77한국에베레스트원정대장
▲78년 북극탐험대장
▲한국등산연구소장(현재)
▲체육훈장 청룡장
▲저서 「나의 에베레스트」
「우리는 산에 오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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