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만년설과 함께 케이크·위스키 “파티”/축제일강풍 야속… 속살 시리다못해 통증/베이스 캠프대원은 외국인들과 한잔도 12월20일. 오늘도 변함없이 누나닥(경사진 언덕)을 계속 올라간다. 성택이의 썰매 프레임이 부러졌다. 구름에 싸인 티힐산맥이 아주 멋있게 보인다. 재춘이 방한화 옆 부분이 터져 걷기가 불편하다고 하소연한다. 아예 신발끈으로 다시 동여맨다. 텐트 안에서 방한화를 수선하지만 본드가 얼어 잘 붙지 않는다. 내 방한화도 뒤축부분의 고무접착이 약해 떨어지려 한다. 갈 길이 반 이상 남았는데 방한화가 걱정이다. 아침부터 태양열판을 썰매위에 얹고 행군했다. 배터리 충전이 잘 된것 같다.
12월21일. 아침에는 구름이 끼여 흐렸지만 바람이 구름을 멀리 밀어내 금세 환해진다. 남위 85도를 넘는 날. 꼭 반정도 온것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이 생각난다. 그래도 티힐산은 가까워지지 않고 먼 곳에 있다.
12월22일. 남극은 하지다. 태양이 가장 높게 떠있는 날이다. 남위 80도에서는 10월19일께부터 이듬해 2월26일까지 17주 동안 낮이 계속된다. 남극점에서는 6개월 동안 낮이 계속되고 6개월은 밤이 계속된다. 오늘부터 식사량을 2컵씩 늘렸다. 텐트에서 내복 양말을 새것으로 갈아입었다. 이번 탐험기간에는 내복이 2벌씩 지급됐다.
12월23일. 오늘은 화이트 아웃. 저장소(FUEL CASH)를 찾는 날이다. 하필 날씨가 나쁜 날인데…. 남쪽으로 1 정도만 가면 저장소가 있을것 같다. 일렬로 운행하는데 성택이가 『깃발이다』라고 소리친다. 희뿌연 날씨에 주황색 깃발이 조그맣게 보인다. 낮 12시께 그동안 찍은 필름을 보관할 수 있었다. 기름통이 11개나 눈속에 파묻혀 있었다.
티힐산맥 왼쪽을 쳐다보면서 큰 사스투르기를 넘어갔다. 저녁 6시께 월코트산(2,088) 하단부 청빙위에 텐트를 쳤다. 나는 주변(남위 88도13분38초·서경 87도55분40초)에서 돌을 주워 썰매에 실었다. 이 돌을 지질을 연구하는 분들께 전달하면 더욱 보람있을것이다.
12월24일. 크리스마스 이브. 서울은 화이트 크리스마스일까. 여기는 매일 화이트 크리스마스다. 서울의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고 들뜬 분위기겠지. 그러나 우리는 오로지 남극점을 향해 걷고 있다.
막영지를 떠난다. 청빙지대가 시작된다. 스키를 신어도 미끄럽다. 썰매가 제멋대로 왔다갔다 해 조종하기 힘들다. 약 2시간 정도 걸려 청빙지대를 빠져나왔다. 이제부터는 급경사. 설면을 걸어가야 된다. 큰 사스투르기가 앞을 가로막는다. 하오 3시께야 햇빛이 나타나고 노란 필러(1,940) 옆을 겨우 벗어났다. 저녁 6시 행군을 멈추고 베이스 캠프와 교신했다. 정길순대원은 크리스마스 이브라 외국인들이 모여 한잔 했다고 한다. 우리는 저장소에 필름을 갖다 놓느라 바쁘게 보냈다.
12월25일. 간밤에 바람은 불지 않았지만 기온은 내려간것 같다. 식사를 준비하는데 갑자기 강풍이 불어온다. 상오 7시 막영지를 출발했다. 윈드 재킷만 입고 운행하는데 바람이 점점 강해져 덧바지를 입었다. 제일 중요한 부분이 시린것 같다. 지퍼를 잠그고 걸었지만 이제는 시리다 못해 아프다. 잠시 서서 사타구니에 손을 넣어 만지작거려 본다. 동상에 걸린 게 아닌지 모르겠다.
운행도중 성택이의 스키 바인딩이 부러졌다. 예비로 갖고 있던 스키로 교환, 곧바로 운행을 계속 한다. 초속 18의 강한 블리자드가 분다. 오늘도 누나닥을 계속 오른다. 하오에는 화이트 아웃. 보행이 불편하다. 운행각도는 1백30도. 오늘도 28를 걸었다. 갖고 있던 케이크와 위스키를 한잔씩 하면서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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