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문화 개방엔 조건이 있다/“결국 상품” 무역적자 대책 필요/TV·라디오방송 엄격 제한을 주일대사의 서울발언으로 일본문화수용론이 돌풍처럼 일고 있다. 진의를 알 수 없으나 우리 정부의 규제완화조치에 기대를 걸고 있는 일본의 분위기를 전달하자는 것이 아니었던가 짐작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중요한 현안을 제쳐놓고 민감한 문제를 거의 일방적인 소신형 설명으로 공언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더욱이 국내 여건을 묵살하고 「개방」에서 진일보한 「일본문화수용」을 주장한 것은 대사의 언사로서는 부적절하다는 생각이다.
이것을 받아 일본언론은 한국에서 일본문화 해금논의가 일고 있으며 매스컴 논조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고 보도하고 『김영삼대통령이 올 봄의 일본방문에 맞춰 단계적 해금을 단행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도 있다』고 성급하게 추측보도하고 있다.
일본정부가 일본의 대중문화에 대한 문호개방을 요구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일본의 총리가 교체될 때마다, 한국의 정부가 바뀔 때마다 여러 경로를 통해 끈질기게 요구해온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사실은 일본문화가 한국에서 거부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단계적 개방이 확대되었다. 90년에 인형극 4건, 뮤지컬 1건이 공연됐으나 91년에는 연극 1건과 인형극 9건, 그리고 작년 93년에는 연극 4건과 인형극 1건, 전통민속 5건이 공연되었다. 문이 닫혀 있는 부문은 극영화와 일본가요의 공연과 만화의 직수입 정도이다. 가장 시장성이 높은 것들이다.
수입이 금지된 영화는 순수한 왜색풍뿐이다. 그것도 왜색이 짙지 않은 합작영화는 선별적으로 허용되었다. 문화영화나 기록영화와 다큐멘터리는 제한이 없다. 지금도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지만 시장성이 약하다는 이유로 기피당하고 있다. 만화영화도 그렇지만 왜색이 짙은 것은 자제하고 있을 뿐이다.
음악부문은 엔카(연가)라는 일본 특유의 대중가요의 무대공연과 음반수입이 불가능할 정도다. 그러나 그 공연도 디너 쇼처럼 제한된 것은 선별적으로 허용되고 있다. 만화부문은 판권을 취득한 번역만화가 출판되고 있다.
우리는 미국의 압력에 견디지 못해 86년 7월 미국영화의 수입을 완전 자유화했다. 85년에 25편에 불과했던 외국영화가 작년에는 4백21편으로 폭증했다. 그중 2백24편이 미국영화이고 86편이 홍콩, 28편이 프랑스, 26편이 이탈리아의 순이다. 돈으로 쳐서 4천만달러에 달한다. 작년에 일본에서 상영된 외국영화가 3백편 정도였다는 사실과 비교하면 엄청난 격차다. 이 때문에 한국영화 상영을 연간 1백46일로 의무화했던 쿼타제도 유명무실하게 돼버렸다.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문호개방은 바로 문화시장의 개방이다. 일본의 문화산업업자들이 우리나라에서 영화를 팔고 노래를 팔고 만화를 팔 수 있도록 허가해주는 것이다. 일본사람들이 우리들에게 공짜로 제공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 규모가 어떻게 될 것인지 짐작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연간 3백억원을 훨씬 넘을 것이다. 일본의 영화계와 레코드업계와 만화출판사가 끈질기게 로비하고 있는 이유도 한국을 황금시장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공식적인 문화교역을 인정하지 않지만 개인적인 접촉과 오락을 자유화한 지금의 이중구조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내년이면 광복 50주년과 한일 국교정상화 30주년을 맞는다. 이러한 역사적인 계기를 가설구조(가설구조)로 그대로 둔채 넘어가기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 뭔가 풀어가는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풀어가는 원칙은 역사적인 수순과 경제적인 처방에 국한돼야 할 것이다. 아직도 남아 있는 일본의 문화침략 청산과 무역적자등 한국경제에 대한 압박제거가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 첫째가 8백25억달러로 누적된 무역적자 해소문제다. 이러한 엄청난 적자를 그대로 두고 일방적인 부담만 가중시키는 새로운 시장의 개방을 주장하는 것은 낯뜨거운 일이다. 개방의 결과는 적자폭의 확대 뿐이다.
만화출판계에 따르면 최근들어 일본의 대형 출판사들이 한국출판사에 대해 판권의 계약을 거부하거나 실행 불가능한 까다로운 조건을 달기 시작했다고 한다. 예를 들자면 그림의 수정을 허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삭제된 커트는 공백으로 남겨 두고 캐릭터의 일본이름도 고쳐서는 안된다는 조건을 내건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직접 진출할 수 있는 시장개방이 임박했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문화시장 개방전에 무역적자 해소책이 서야 할 것이다.
둘째는 한국 영화산업발전을 위한 기금조성문제다. 영세한 우리 영화계는 일본영화 상륙으로 빈사상태에 빠질 것이다.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길은 자금과 기술의 공급이다. 일본의 영화업자들이 여기에 협력하는 길을 터야 한다. 기업의 해외문화협력은 일본이 권장하는 과제다.
셋째는 극영화의 단계적 개방이다. 전제조건이 이루어지더라도 극영화는 단계적으로 개방돼야 한다. 먼저 합작영화를 개방하고 그 다음에 왜색이 짙지 않은 작품의 개방으로 넘어가야 한다.
넷째는 TV와 라디오를 일본 대중문화에서 분리하는 문제다. 영화의 방송은 엄격하게 제한돼야 하며 가요의 방송은 금지돼야 한다. 일본 대중문화가 미디어를 타게 되면 확산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질 뿐 아니라 청소년들에게 미치는 영향도 조정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케이블 텔레비전, 그 중에서도 프로그램 판매방식의 케이블 텔레비전의 등장과 함께 청소년비행이 급증한 미국의 경우를 참고해야 할 것이다.
다섯째는 약탈문화재와 도서의 반환문제다. 이것이 역사적인 수순이다. 일본의 문화재와 도서약탈은 청일전쟁 무렵인 1894년에 시행된 보물수집법에 의해 군과 관을 앞세워 조직적으로 감행된 것이다. 패전후 맥아더사령부의 인식착오로 반환대상에서 한국이 누락됐을 뿐이다.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사내정의)가 약탈한 엄청난 분량의 전적(전적)이 야마구치(산구)에 남아 있고 2대 총독 소오야가 약탈한 많은 전적중 일부가 일본궁성에 있다. 73년에 열렸던 일본학술회의가 한국에서 약탈한 도서를 반환하라고 결의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세계는 지금 문화의 시대다. 그러나 한일간의 장벽은 반문화적인 숙제에 있다. 문화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고쳐야 하겠지만 이 숙제해결을 위한 노력도 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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