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차폐지·주관식문제 등 개선 활발/「가르치는 방법」 연구·개발엔 소홀… 실질효과 적어 90년대 들어 초중등학교에서는 학생들에 대한 평가방법을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히 일고 있다.
특히 국민학교의 경우는 괄목할만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평가방법 자체와 평가를 축으로 한 일련의 교육과정 전반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미미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책상위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는 우리나라 교육연구의 한심한 수준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단답형시험 탈피
지난해 11월30일 서울YMCA 묘우당에서는 「국민학교 새교육 평가제도의 바람직한 방향을 위한 간담회」가 열렸다. 간담회의 주제는 「국민학교 교육평가의 개선방향」이었다. 모 명문대학의 사범대교수가 「학교평가의 현실」이라는 주제발표를 했다.
그 교수는 현재 국민학교에서의 평가는 ▲선발주의적 측면만을 강조하는 바람에 학생들의 고득점 경쟁을 유발시킨다 ▲교육내용을 얼마나 소화했는지를 알아보는 「평가」가 아니라 점수의 「측정」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교과서 중심의 평가가 교육정상화의 본래 의미를 축소시키고 있다는 점등을 문제로 제기했다.
그러나 이같은 발제는 한 학부모의 지적으로 곧 탁상공론임이 드러났다.
학부모는 『현재 국민학교에서는 더 이상 선발주의적 평가관을 채택하고 있지 않으며 반석차나 전교석차등이 폐지된지는 오래』라고 반박했다. 발제자는 국민학교에서 평가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탁상공론을 펼치다 망신을 당한것이다.
현재 전국 대부분의 국교에서는 최소한 10년전의 방법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개선된」방식으로 학력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1·2학년의 정기적인 일제고사가 폐지된것은 이미 1∼2년전이고 고학년들도 더 이상 종래의 단답형 지필고사에 얽매여 있지는 않다.
○창의력제고 중점
종합적 사고력과 창의력을 제고하는 방향으로 주관식 문항의 모델들이 개발되고 있으며 서술과 논술문항도 일관된 출제방향을 잡아나가고 있다.
그렇다면 국민학교의 평가방법개선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것인가. 그렇지 않다. 단순히 평가방법개선차원을 넘어서 더 심각한 문제가 내연하고 있다.
수업방식과 교수방법등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있는것이다. 수업내용등 구조적인 변화가 병행되지 않는 평가방법의 개선은 「낡은 집에 페인트만 다시 하기」정도의 변화 밖에는 이끌어낼 수 없다.
국민학교 평가방법개선작업은 일선학교와 시도 교육청별로 경쟁적으로 추진돼 왔다. 석차제를 폐지한데 이어 「수」 「우」 「미」 「양」 「가」등의 평가표시도 「매우 잘함」 「잘함」 「노력바람」등으로 보다 완곡한 표현으로 바뀌어갔다.
주관식 문항의 출제비율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같은 바람은 서울등 대도시 학교뿐아니라 벽지국교에도 불어오고 있다.
충북 T국교 권규선교사(50)는 『이미 3년전부터 문항출제와 평가전반에 대한 개선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보다 교육적 효과가 높은 문항개발을 위해 대도시의 사례도 수집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종래의 수업내용, 교수학습방법, 평가에 대한 기본관념등이 그대로 유지되는 상태에서 단순히 평가라는 포장만 달라지고 있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평가방법개선의 당위성은 결국 학교교육의 정상화를 이루려는 지향점에서 출발한다. 학교교육의 정상화란 입시제도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그동안 점수따기·단순암기등의 방향으로 편향됐던 학교교육을 교육목표에 따라 제자리에 놓는 작업을 말한다.
주입식 수업방법의 전환, 실험실습의 강화, 인성 및 교양교육에 대한 강조등이 골자를 이룬다. 평가방법의 개선작업은 결국 학교교육 왜곡의 주범이었던 학력평가방식을 바꿈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수업을 비롯한 학교교육전반의 변화를 이끌어내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항개발을 비롯해 평가문항개발에는 열성적인 각급 교육청과 일선학교가 정작 수업방법의 개발이라든지 교수법의 연구등 구조적인 문제에는 애써 외면하려 한다.
○글짓기학원 성업
일찍부터 평가문항개발과 성적기록방식을 개선해온 서울 H국교의 서영원교사(47)는 『사실 평가방법개선과 관련해 수업내용을 바꾸는 연구와 모색이 시급하지만 교수법이라든지 수업모델등을 일선에서 연구하는데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효과적인 교수법등 수업모델이 제시되지 않음으로써 평가방법의 개선이 또다시 구태의연한 교육적 부작용을 빚을 기미를 보이고 있는것도 문제이다.
서울 강남의 한 국교교사(30·여)는 『평가방법과 성적기록방식이 바뀌었다지만 그 변화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유도되고 있는지는 두고 봐야 할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실기고사의 고득점을 바라는 피아노·성악·속셈등의 과외는 바람직한 교육변화를 사교육시장에 팔아먹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평가방법개선에 맞춘 학교수업의 변화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설학원을 포함한 사교육기관이 오히려 앞지르기를 하고 있는것도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라는 지적이 많다. 대도시에서는 사설 글짓기학원등이 성업중이며 글짓기 개인과외까지 등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여기에는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일부 학부모들의 잘못된 교육열도 가세하고 있는 셈이다.
서울시교육청 서성옥초등국장은 평가방법개선이 수업, 나아가서는 학교교육 전반에 대한 개선으로 귀결돼야 한다는데 공감을 표시하고 『평가방법개선에서 교육적 효과를 얻기 위해 교육개발원이나 관련학자들이 수업모델개발등 장기적인 연구를 도출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모든 시험 주관식… 교과서·전과외 책읽는 학생 늘어나/모범사례/서울 고산국민학교
학력평가결과를 기록한 생활기록부나 성적통지표에는 당시의 학력평가관이 반영돼 있다. 일제강점기 이래 국민학교의 학력평가는 학년석차와 학급석차 위주여서 학생들에게 불필요한 점수따기경쟁을 유발시키는등 비교육적인 부작용을 빚어온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생활기록부체제가 바뀌기 시작한것은 50년대 중반부터였다. 해방이전까지는 일본과 같이 생활기록부의 과목별 성취도를 10점 만점으로 표기했다.
서울교동국교의 경우 해방 이듬해인 46년부터 1백점 만점으로 환산한 점수가 표시됐으며 55년도부터 지금까지 학업성취도를 「수」 「우」 「미」 「양」 「가」로 표시하고 있다.
50년대 중반에는 한때 갑, 을, 병, 정등 4단계로 구분하는 학교도 있었다. 최근에는 대부분의 국교가 「잘함」 「보통」 「노력바람」, 「매우 잘함」 「잘함」 「노력바람」등 3단계의 학업성취도만을 성적표에 기재,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한편 1, 2학년등 저학년을 중심으로 학업성취도를 서술양식으로 표시하는 학교도 늘고 있다.
최근 서울시교육청은 국교뿐아니라 중고교에서도 서술식으로 학생들의 학력을 평가하도록 권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방식은 수업방법이 근본적으로 변해야만 타당성과 실질적 효과를 가질 수 있을것으로 교육전문가들은 보고있다. 서울시교육청이 지난해 3월 주관식평가 시범학교로 지정한 고산국교(교장 이순근)는 모든 시험문제를 주관식으로 출제·평가함으로써 학생들이 어려서부터 종합적 사고력을 배양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이 학교는 기존의 객관식 평가방식에서 탈피, 음악 미술등 실기평가과목을 제외한 전교과에 대해 주관식으로 평가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일제고사가 폐지된 1, 2학년을 제외한 전학년이 모든 시험을 주관식으로 치르고 있다. 주관식 문제유형은 완성형, 어구적 단답형, 서술적 단답형, 분량제한 논문형, 내용범위제한 논문형, 서술양식제한 논문형, 응답자유 논문형등 크게 7가지이다.
학생들도 처음엔 답안작성에 애를 먹었지만 기존의 단순암기식 학습태도가 바뀌는등 공부방식과 내용이 크게 개선되고 있다.
고산국교가 지난해 11월 평가개선작업결과를 정리, 발표한 「주관식 평가의 일반화방안」자료집에 의하면 종합적 사고력을 중시하는 주관식 평가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학생들이 교과서 이외의 다양한 참고자료를 활용하는 경우가 크게 늘어난것으로 나타났다. 평가방법을 개선한후 종전처럼 문제집이나 전과위주의 학습을 하는 학생이 조사대상(3백82명)의 24%(94명)에 그친 반면 교과서 이외의 참고서적등을 이용, 폭넓게 공부한다고 응답한 학생이 67.3%(2백57명)에 달했다.
또 주관식 평가가 평소 학습활동에 미친 영향에 대한 조사에서 응답자(3백2명)중 40.8%(1백23명)가 주관식 평가에 대비, 독서를 한다고 했고 18.5%(56명)는 일기쓰기나 글짓기에 주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교사들은 주관식 평가방식이 정착되려면 과학적인 채점방법은 물론 종합적인 사고력을 측정할 수 있는 다양한 문항개발이 선행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순근교장은 『주관식 평가는 출제가 어렵고 채점에 대한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고등정신을 길러줄 수 있는 장점이 훨씬 많다』며 『학습목표에 맞춰 주관식 문항을 다양하게 개발하고 채점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높이기 위한 연구를 계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반
설희관차장·하종오·최성욱·황유석·김준형·장학만(사회부)
이종철기자(사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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