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악 이숭영선생님. 피란지 부산의 을씨년스런 천막 가교사를 아랑곳하지 않고 국어학을 정력적으로 강의하시던 선생님. 그때 처음 뵌지 벌써 반세기가 가깝습니다. 그동안 언제나 가까이 맴돌며 가르침을 받다가 이제 선생님을 영영 떠나보내게 되니 선생님의 크신 발자취와 무한한 은혜를 새삼 느낍니다. 선생님은 스스로의 수필에 쓰신대로 「대학가의 파수병」이셨습니다. 『늙은 내가 새벽 두시까지 공부하는데 젊은 사람은 그보다 더 해야 한다』고 학생들을 독려하는 파수병이셨습니다. 새벽까지 공부한다는 것이 제 자랑으로 비치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후배와 학생들에게 주신 자극제였습니다. 또한 그것은 선생님 스스로를 매는 올가미이기도 하였습니다. 자승자박을 위한 자랑이고, 일종의 자기최면이었습니다. 그런 올가미로 하여 선생님은 글자 그대로 등신대의 업적을 쌓으셨습니다. 학문의 열정으로 넘치는 대학가의 크나큰 파수병을 잃었음을 슬퍼합니다.
선생님은 과학으로서의 국어학연구를 천직으로 삼으셨습니다. 애국운동으로서는 학문이 대성할 수 없음을 강조하셨습니다. 한글창제의 동기와 최만리의 한글창제 반대상소의 정당한 인식을 강의로, 논문으로, 심지어 사석에서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진정한 국어학연구는 1930년대 선생님의 음운론연구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선생님이 걸어오신 길은 국어학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선생님의 국어학은 외국에서 명성이 더함을 체험합니다. 선생님 제자의 반열에 끼였다는 사실만으로 저희는 외국에서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습니다. 국어학의 큰 기둥이 사라짐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생님은 「완고한」국어학자만은 아니셨습니다. 심악이란 아호 그대로 범할 수 없는 위엄을 겉으로 가지셨지만, 선생님은 따뜻한 마음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서울시문화상 상금을 부모님의 위토를 위하여 선뜻 내놓으신 일, 어려운 제자에게 몇년이고 숙식을 제공하신 일이나 민주화운동으로 쫓기는 학생을 집에 숨겨주신 일들은 저희 제자들이 감히 따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 선비의 훌륭한 풍도를 못보게 되니 아쉽기 그지 없습니다.
못다한 국어학연구 때문에 중환자실에서 의료진을 붙들고 우셨고, 말씀도 못하시는 투병기간에도 원고를 쓰시려고 몇번이나 시도하셨다는 이야기는 저희 제자들의 옷깃을 다시금 여미게 합니다. 새 봄이 움트는 립춘에 선생님은 흙으로 돌아가십니다. 선생님이 가꾸신 국어학의 토양에서 국어학의 연구는 새 봄과 함께 왕성하게 일어나리라 믿습니다.
모든 일 잊으시고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시옵소서.
1994년2월2일
제자 안병희 삼가 씀 (국립국어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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