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운체계 과학적 정리 큰 업적/고희 넘어서도 학문정진… 귀감 국어학계의 큰별 심악 이숭녕박사는 종래의 국어학 연구에 근대 언어학적 방법론을 도입하고 근세어연구, 중세문법 등 국어학사를 재정리하여 본격적으로 오늘날의 국어학을 탄생시킨 「산모」였다.
법학과를 떠나 『우리말의 뿌리를 우리가 되찾아야 한다』는 젊은이다운 사명감에 문과로 방향을 선회한 이박사는 45년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로 부임한 후 92년까지 국어학 관련부분만 「음운론연구」 「국어조어논고」등 단행본 20여권, 논문 1백30여편을 낸 정력적인 학자였다.
그가 가장 큰 관심을 기울였던 분야는 음운론이었고, 그는 우리말의 음운체계를 과학적으로 정리하는데 열정을 기울였다. 그는 훈민정음의 서술내용과 음운론적 고찰을 통해 중세 우리말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아래 아」의 음가를 추적한 저작으로 우리말 연구에 새 장을 열었다.
심악은 또한 음운체계와 음운현상과의 역동적 관계를 규명한 논문 「조선어의 히아투스와 자음발단에 대하여」등을 통해 음운론을 확고히 다져나갔다.
1908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학자요, 교수로서뿐만 아니라 초대 대한산악연맹회장, 방송위원회 윤리위원, 백제문화개발 연구원장등의 경력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사회적으로도 많은 활동을 했다. 또 연구활동 중에도 등산 검도 승마 스케이트 수영을 즐겼으며 국토 청결과 남북통일 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연구실을 떠난 학자는 있을 수 없다』는 그의 학문적 자세는 확고했다. 『아흔살까지 연구하고 백살까지 책을 읽겠다』고 호언할 만큼 정정했던 그는 고희를 넘어서도 자신의 전공과 무관한 「어명고찰」 「세종대왕의 학문과 사상」 「한국다에 대한 연구」등의 논문을 발표하여 세인을 놀라게 했다.
팔순이 넘도록 건강과 학구열을 과시하면서 감기조차 앓지 않던 그는 89년 2월 뇌관경색증으로 호흡장애를 일으켰으며 그뒤 1년여 동안 입원생활을 했다. 그러나 놀랄만큼 회복이 빨라 퇴원 후 집에서 요양하면서도 밤늦게까지 서재를 지키고 제자들의 학문적 정진을 독려했다.
주변의 많은 제자들은 『고인이 서울대 예과 국어학 개론 강의 때도 영어 불어 희랍어 라틴어 독일어 등 6개 국어를 동원하면서도 끝에는 「우리 것을 살려야 한다」는 말을 잊지 않을 만큼 우리말에 대한 애정과 집념이 강했다』고 회고했다.【최진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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