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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빙 위스키(허영호공격대장 탐험기/남극점에 서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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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빙 위스키(허영호공격대장 탐험기/남극점에 서다:4)

입력
1994.0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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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위1도 넘을때마다 위스키 한잔 “자축”/만년빙섞어 마시면 “희한한 맛·묘한기쁨”/대원들이 서로 사진찍으며 “긴장속 여유” 12월 2일. 몸이 피곤한지 새벽에 자꾸 잠이 깨곤 한다. 식사후 텐트 밖에 나가보니 바람이 밤새 불어와 커다란 눈언덕이 생겼다. 주변에 있는 슬레지(썰매)가 전부 덮여버렸다. 오늘은 날씨가 흐리고 시야가 가려지는 화이트아웃(WHITEOUT)현상. 하루 종일 행군하는데 날씨가 너무 나쁘다. 베이스 캠프에 있는 엘즈워드산맥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하오 2시30분께 남위 80도를 넘었다. 온도가 조금 올라가고 바람도 많이 약해졌다. 오늘은 약 25를 전진했다. 남극점까지 행군을 떠나면서 남위 1도(1백11)를 넘을 때마다 위스키를 한잔씩 하기로 했는데 오늘 1도를 넘었으므로 몇만년 된 빙원 위에서 만년빙을 섞어 온 더 록스로 위스키 한잔을 했다. 이 기쁨과 맛은 우리 4명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일것이다.

 이제 빨리 자고 내일은 더 멀리 가야 하는데 매일 똑같은 행군에 모두가 잘 적응하고 있다. 오늘도 베이스 캠프와 교신. 우리는 잘 들리는데 베이스 캠프에서는 수신불량으로 전혀 알아 들을 수 없다는 소리만 들린다.

 12월 3일. 아침에 일어나 텐트 밖을 보니 화이트아웃현상은 어제나 다름없다. 시계는 제로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오른쪽에서 초속 10로 불어온다. 하오에는 눈이 날렸다. 얼굴에 차가운 바람이 스치면 코끝이나 양볼의 피부가 아프게 얼어버린다. 오늘부터 12시간씩 행군하는 날이다. 하오 6시가 넘으면서 대원들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막영지에 도착해 스키를 벗으면 발이 가벼워지고 구름위를 걷는 기분이다. 그래도 앉아 있는것이 낫다. 일어서면 다리근육이 뭉쳐서 한동안 움직일 수 없게 되고 다리에서 힘이 빠진다.

 12월 5일. 강한 블리자드는 초속 20가 넘는다. 오늘도 운행하기가 끔찍스럽다. 우선 텐트를 걷고 식량 장비를 썰매에 꽉 묶는다. 강한 바람과 눈보라 때문에 코끝이 따끔따끔 아파온다. 얼굴을 옆으로 돌리기는 하지만 다시 앞을 보아야 하기 때문에 운행하는데 불편하다. 뿌옇게 휘날리는 설연(설연)은 멋있게 보이지만 우리는 추위와 바람과 싸우면서 사방이 둥근 원탁 위를 걷고 있는것이다. 아마 사진으로 보면 독자들은 멋있게 보이겠지만 대원들은 고행의 길을 가고 있다. 오늘은 카메라를 대원들이 돌려가며 사진 찍는 날. 그래야 각자가 생각했던 멋진 사진이 나올것같다.

 운행하다가 대변을 보는데 바람과 눈이 나를 하얗게 덮어버린다. 방위를 확인한 결과 20를 걸었다. 현 위치는 남위 81도51분28초, 서경 81도39분36초.

 12월 6일. 간밤에 소변이 마려워 잠이 오지 않았다. 귀찮아서 계속 참았지만 아랫배가 불편하다. 15ℓ짜리인 소변통을 찾아 누워서 소변을 보니 힘을 주어도 오줌이 나오질 않는다. 에라 추워도 일어나야지.

 오늘 아침에는 비디오 카메라를 가동했다. 배터리를 버너불 옆에서 따뜻하게 한뒤 사용했지만 약 15분 정도 찍자 배터리가 방전돼버려 더 이상 찍을 수가 없었다. 바람은 오늘도 정면에서 불어온다. 도대체 어디가 남극점인지 대원들은 그저 말없이 걷고 있다.

 저녁 늦게 구름이 온 사방을 덮어버린다. 오늘도 베이스 캠프와 교신하는 날이지만 우리만 잘 들리는 현상은 여전하다. 저쪽에서는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다고 한다. 그저 『로저』 『로저』하다가 교신 끝이다. 오늘은 왼쪽 다리의 장딴지 근육이 조금 아프다. 자고 나면 깨끗해질까. 내일은 남위 82도를 넘을 수 있을것같다. 위스키 한잔을 또 할 수 있겠지.

 12월 7일도 화이트아웃. 해발 1천6백의 빙원이다. 비교적 빙원이 좋아졌다. 날씨도 좋고 온도도 높아졌다. 저녁때 텐트에서 대원들이 양말을 벗는데 보니 9일만에 양말이 펑크가 났다.

 12월 8일. 날씨는 좋은데 바람이 초속 20를 넘는다. 오늘도 손과 발이 계속 시려온다. 하오에는 텐트치기가 불편했다. 오늘은 교신하는 날. 처음으로 상태가 좋아 의사소통이 자유로웠다. 윤평구기자의 『대원들 모두 건강하냐』가 첫번째 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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