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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유배생활서도 인품“명성”/일본망명:중(개혁풍운아 김옥균: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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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유배생활서도 인품“명성”/일본망명:중(개혁풍운아 김옥균:11)

입력
1994.02.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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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명인·섬주민들과 교류 「한」달래/섬아이들 함께숙식…˝아버지˝ 호칭/“개혁꿈 이렇게 끝나나” 내무대신에 비장의 편지 김옥균은 1886년 8월30일 도쿄에서 1천 떨어진 오가사와라(소립원)의 제일 큰 섬인 치치시마(부도)에 유배의 첫발을 딛었다.

 20일 동안 힘겹게 항해해온 범선 히데사토마루(수향환)를 내려서며 김옥균은 그가 머무르던 도쿄와 갈 수 없는 조국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출렁이는 파도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가 눈에 들어왔다.

 배멀미로 창백해진 김옥균의 얼굴에는 새삼 절망의 빛이 역력했고 입에서는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오가사와라는 도쿄 남쪽 9백부터 1천3백 사이에 있는 30여개의 섬으로 구성된 군도. 북회귀선 바로 위쪽으로 치치시마(부도)·하하시마(모도)가 있고 가족처럼 이름 붙여진 작은 섬들이 가득히 흩어져 있다.

 김옥균은 도쿄부에서 지정한 초옥에서 유배생활을 시작했다. 유배생활은 군도를 벗어나지 않는 한 자유로웠지만 고립과 단절을 의미하는것이었다. 집 주변에는 그를 감시하는 비밀경찰의 초소가 있었고 도쿄와 오가사와라 사이에는 3개월에 한번 정기선이 오갈 뿐이었다.

 그 1천의 뱃길을 마다하지 않고 바둑의 명인이 찾아왔다. 제17대, 제19대 홍인보(본인방)를 지낸 슈에이(수영)였다. 바둑의 명인이 유배당한 망명객을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춤에서 노래에 이르기까지 많은 재주를 지닌 김옥균은 바둑실력 또한 빼어났다. 김옥균은 슈에이와 6점 접바둑을 둘 정도로 바둑의 고수였다.

 김옥균이 오가사와라로 유배당하기 직전 슈에이는 그의 바둑 맞수인 무라세슈호(촌뢰수보)에게 홍인보 자리를 넘기라는 여론에 시달렸다. 그러나 고집스런 슈에이는 완강히 여론을 무시했고 바둑계에서 그의 입지는 점점 불안해져 갔다. 이 문제는 당시 일본 바둑계에 커다란 문제였다.

 이때 나선 사람이 김옥균이었다. 김옥균은 슈에이를 설득했고 누구의 말도 듣지 않던 슈에이는 김옥균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3개월 후 슈호가 죽었다. 슈에이는 홍인보 자리가 당연히 자기에게 돌아올것으로 기대했으나 여론은 슈에이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착잡해진 슈에이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김옥균을 찾아왔던것이다.

 「3개월 동안 김옥균과 슈에이가 1만국의 바둑을 두었다」는 전설이 오가사와라에 전해질 정도로 이들은 많은 바둑을 두었던것같다. 그리고 슈에이의 방문은 김옥균에게 커다란 위안이었다.

 김옥균은 오가사와라에 사는 동안 네번에 걸쳐 거처를 옮겼다. 그 가운데 치치시마의 남쪽 해안에 있는 센우라(선포)라는 작은 포구마을에서 사는 동안 김옥균은 가장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87년2월 도쿄부에서 지정한 집을 떠난 김옥균은 센우라에 손수 집을 지었다. 이때 그곳에 살던 어린아이들과 김옥균의 우정은 지금도 오가사와라의 노인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김옥균의 집에서 어린이 10여명이 숙식을 함께 했다고 한다. 김옥균은 이 어린이들과 함께 산과 들을 다니며 나물을 캤고 바닷가에 나가 고기를 잡았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지면 김옥균은 가정형편으로 학교에 가지 못하는 이들을 정성껏 가르쳤다.

 이들은 1885년4월 오가사와라의 한 석탄회사가 광원들의 임금을 지급하지 않으면서 일어난 오가사와라폭동 주동자들의 자녀들이었다. 김옥균이 아버지없는 이들을 보면서 서울에 두고 온 어린 딸을 생각했음은 짐작할만 하다.

 이들은 김옥균을 한국말로 「아버지」라고 불렀고 김옥균의 요긴한 정보원이기도 했다. 김옥균은 오가사와라로 온 직후 자신을 체포하기 위해 청국 군함 3척이 치치시마를 포위했다는 소문을 들었고 정기선이 들어올 때마다 산 속으로 숨었다.

 『아버지, 수상한 사람은 없어요』

 항구에 나가 사람들을 일일이 살피고 쪼르르 달려와 이렇게 말하는 어린이들의 밝은 표정을 보기 전엔 김옥균은 산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이 어린이들 중의 한 사람이 김옥균이 상하이로 갈 때 그를 수행했던 와다(화전연차랑)였다. 이때 와다는 기타하라(북원)라는 가명을 썼다.

 김옥균의 고매한 인품과 높은 학식, 그리고 그의 명성은 오가사와라에서 사람이 살고 있는 치치시마와 하하시마에 퍼졌고 그는 전 주민의 존경을 받았다. 김옥균과 절친했던 다치기(립목겸선) 오가사와라 촌장의 일기 속에는 김옥균이 그의 어린 손녀와 「하네츠키」놀이(배드민턴과 비슷한 놀이로 공을 떨어뜨리면 벌칙으로 얼굴에 검정칠을 한다)를 하는 소박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김옥균은 또한 바둑회를 조직해 바둑에 열중했고 하하시마 소학교에 선생님으로 초청돼 서예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유배생활이 2년이 넘어설 무렵 자연과 어린이, 그리고 순박한 섬사람들과의 교류 속에서 세상사를 잊은듯 했던 김옥균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김옥균은 해변가에 앉아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수평선 너머로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세게 밀려오는 파도가 그가 걸터앉은 바위를 때리며 부서졌고 그의 옷은 바닷물에 흠뻑 젖었지만 김옥균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의 개혁의 꿈은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이윽고 김옥균은 벌떡 일어섰다. 수심이 가득하던 그의 얼굴은 단호한 의지로 가득했다. 1888년 7월이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비장한 표정으로 내무대신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유배지를 옮겨 달라는 내용이었다.<도쿄=글 서사봉기자 사진 손덕기기자>

◎일본여인과의 사랑:상/5∼6명 여인과 연정… 한 기녀와 살림

 김옥균에게는 망명자의 한과 향수를 달래준 몇명의 일본여인들이 있었다. 

 황망하게 부인 유씨와 생이별한 그였지만 10여년에 걸친 쓰라린 망명생활 중 적지 않은 일본여성들과 애틋한 사랑을 나눴다. 암살자들을 피해 유랑생활을 해야했던 그의 사랑은 그러나 짧고 불안한것이었다.

 사랑을 나눈 대여섯명의 일본여인 중 그가 가장 사랑한 여인은 14세 연하의 기생 스기타니 다마(삼곡옥)이다. 둘은 1889년 그가 홋카이도(북해도)로 유배된 직후 만났다. 김옥균이 서른 여덟, 다마가 스물 넷이었다.

 김옥균이 하코타테(함관)의 가쓰다(승전)온천에서 요양하던 무렵. 김옥균은 어느 날 화투판에서 8백엔이란 거금을 따자 기쁨에 넘쳐 급히 일어섰다. 그의 걸음은 한 요정 앞에 멈췄고 게이샤(기생) 한명을 3백엔에 샀다. 그녀는 전부터 김옥균을 연모하던 하코타테 최고의 미인 다마였다. 

 홋카이도 명망가들과 교제가 많았던 김옥균은 화투나 노래·춤이 출중하고 또한 인품이 고매해서 가장 기생들의 흠모를 받는 인물이었다.

 이들은 곧 살림을 차렸고 다마는 김옥균이 1890년 3월 도쿄로 떠날 때 그를 따라와 교바시구에서 동거했다. 그녀는 김옥균이 상해로 떠날 때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김옥균의 여비를 마련한 사람이었고 그가 떠난 뒤에는 매일 아침 정한수를 떠놓고 그의 무사귀환을 빌었다.

 그러나 김옥균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그녀는 1894년 4월초 아사쿠사지(천초사)에서 열린 김옥균의 위패만 모신 장례식에 참석했다. 

 『저는 여자의 몸으로 「아버지」(다마는 생전의 김옥균을 이렇게 불렀다)의 큰 뜻을 알 수는 없지만 생전의 우의를 생각해서라도「아버지」의 앞으로의 일을 잘 부탁드립니다. 혹 저같은 여자라도 무슨 일이 있어 찾아주시면 언제라도 잡수시는것쯤은 불편이 없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저야 별 수 없이 또다시 흐르는 강물 위에 뜬 대나무 조각 신세가 됐습니다만…』

 그녀는 자신을 알아 본 김옥균의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하며 울었다. 그후 그녀의 소식은 완전히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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