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만 멈춰도 체온급강하… 쉼없이 전진/콧수염엔 고드름… 손발은 얼어서 통증/저녁식사뒤 밀려오는 피곤 “곧바로 잠” 11월 29일. 칠레를 떠난지 나흘째다. 새벽 5시30분 기상한 성택(28)과 재춘대원(32)은 취사준비에 바쁘다. 이번 탐험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이 순으로 취사당번을 맡기로 했다. 물론 나이가 적은 대원이 주방장이다. 그래도 성택과 재춘은 『저희가 취사를 할테니 형님들은 뒤에서 보고나 계십시오』하면서 손을 걷고 나선다.
상오 8시에 막영지를 떠나 경사진 인디팬스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두껍게 덮여 있는 푸른색 얼음과 눈이 앞길을 가로막는다. 썰매가 무겁고 잘 끌리지 않자 성택은 아예 스키를 벗은뒤 등산용 아이젠으로 갈아 신고 썰매를 끈다.
상오 11시가 돼서야 인디팬스언덕을 올라 안부에 도달했다. 이제부터는 방위각을 정해 운행해야 한다. 방위각은 1백60도이다. 눈앞에는 넓은 설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운행하다 잠시 쉬기라도 하면 체온은 금방 식어버린다. 콧수염 근처에 허연 고드름이 생기고 손과 발은 꽁꽁 얼어 시리다가 금방 아파 온다. 재춘이가 『배가 고파 더 이상 못 가겠다』면서 뒤로 처졌다. 재춘이를 위해 나는 비스킷과 보온병을 빙원위에 세워두고 남극점을 향해 계속 전진했다.
12월 1일. 오늘따라 강한 블리자드(눈보라를 동반한 강풍)가 온 종일 불어대고 있다. 초속 20가 넘는 바람이 우리를 향해 정면으로 불어온다. 전진이 점점 힘들어진다. 승환(34)의 얼굴에 물집이 생기고 가벼운 동상이 시작됐다. 블리자드가 몰아닥치면 먹는 것, 쉬는 것도 귀찮아질 때가 많다.
하오 5시에 운행을 멈추고 딱딱한 빙원을 찾아 텐트를 치기 시작했으나 시간이 많이 걸렸다. 강한 바람 때문에 텐트의 세 귀퉁이에 스노바를 박은뒤 4명이 달라붙어 텐트를 설치하지만 고정시키기가 쉽지 않다. 텐트바닥에는 두꺼운 단열 매트리스를 이중으로 깐다. 신고 있는 방한화를 벗는데 성에가 잔뜩 끼어 잘 벗겨지지 않아 결국 다른 대원들이 잡아당겨야 했다.
텐트안에 버너를 켜놓자 비로소 온기가 느껴진다. 우선 텐트안 천장에는 장갑, 모자, 양말, 방한화, 안전벨트등이 주렁주렁 걸린다. 온도가 높아지면서 입고 있던 옷의 성에가 녹아 축축해진다. 그래도 다리를 뻗고 비스듬히 누우니 편안하게 느껴진다.
취사준비를 하는 동안 녹음기에서는 즐거운 음악이 흘러나온다. 이번 탐험에서는 녹음기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고민을 많이 했다. 배터리를 무작정 많이 가져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많이 가져와야 소용도 없었다. 극지방에서는 어떤 배터리라도 금방 얼어 방전돼 버린다. 나는 우리가 갖고 있는 무선통신용 배터리(12V)를 어댑터에 연결해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했다. 이 무선용 배터리는 태양열을 이용해 전원을 얻는다. 텐트주변이나 썰매 위에 얹어 운행하면 자동으로 충전된다. 남극은 현재 24시간 해가 떠있는 백야가 계속되고 있다. 배터리가 과충전으로 터질 염려가 있고 흐린 날은 오히려 방전돼 못쓰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중간에 다이오드(전기의 과부하를 막는 퓨즈의 일종)를 설치, 과충전과 과방전을 방지했다.
밖에는 강한 바람이 불지만 텐트 안은 비교적 따뜻하다. 에코로바에서 고어텍스 원단으로 별도 제작한 텐트의 내피는 성에를 막고 보온효과를 높이기 위해 이중으로 만들어졌다. 침낭은 극지방의 낮은 온도에서 오래 써야 하기 때문에 화학섬유인 퀄로필 소재로 돼있다. 흔히 알고 있는 털로 된 침낭은 극지방에서는 무용지물이다. 털이 얼어붙어 오히려 불편한 점이 많다.
버너는 휘발유버너 3개를 가지고 왔다. 두개는 매일 사용하고 나머지 한개는 예비용이다. 취사중에는 모든 것이 중요하기 마련이지만 버너의 밑받침이 특히 중요하다. 많은 물을 만들기 위해 눈을 녹여야 하는데 조금만 잘못해도 물을 쏟을 염려가 있다. 연료도 마찬가지다. 계속되는 행군에서 대원들은 매일매일 연료통을 점검해야 한다.
연료는 우리가 탐험을 끝낼 때까지 유일하게 열을 얻을 수 있는 휴대품이다. 그외에는 우리의 체온밖에 없다. 남극권에서 살아 있는 생물은 우리 대원 4명밖에 보이지 않는다. 저녁식사가 끝나자 온몸이 나른해지면서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피곤이 엄습한다. 침낭에 눕는 순간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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