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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금동향로/최종태 조각가·서울대교수(문화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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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금동향로/최종태 조각가·서울대교수(문화칼럼)

입력
1994.01.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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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즘 들어 유물발굴 소식이 자주 전해지고 세인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경사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부여에서, 남해에서, 김해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그것인데 임진란과 거북선, 가야땅의 일본지배설, 백제 문화의 본모습등 우리 역사와 민족의 자존심에 대한 열쇠가 거기 걸려 있기 때문이다. 고고학이라고 하는 학문이 새삼 그 뜻을 되새겨보게 하는 때이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부여에서의 금동향로 발굴은 참으로 감격적인 사건이었다. 지고한 아름다움의 발견이므로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아직 실물은 보지 못했지만 보도를 통한 사진 몇장 만으로도 충분히 그것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1천4백년간 땅 속에서 기나긴 잠에 빠져 있다가 문득 털고 일어난 선녀와도 같은 마치 동화 속의 이야기처럼 신기하고 신선한 충격이었다.

 야스퍼스가 일본을 돌아보고 목조반가사유상을 격찬한 일 하며 앙드레 말로가 목조백제관음에 대해 찬탄했던 일은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가 되어 있다. 『내가 철학자로서 세계의 걸품들을 많이 보았지만 이같이 훌륭한 것은 처음 보았노라』한 것은 야스퍼스의 말이고, 『일본이 만약 바닷속으로 가라앉는다 할 적에 나는 백제관음상을 건지겠노라』한 것은 앙드레 마로의 말이었다. 지금은 부여박물관에 모셔져 있는 금동미륵반가상이 구미 여러 곳에 순회전시될 때 얼마나 많은 찬사를 받았던가.

 어떤 서양의 학자는 석굴암조각을 일러 「아시아의 빛」이라 하였다. 나는 경주엘 갈적마다 태종무열왕릉비를 보는데 그 용을 만든 솝씨에 경탄을 금할수 없다. 나도 이 세계에서 인류가 만든 위대한 걸작들을 많이 보았지만 위에 말한 우리 조상들의 솝씨를 능가하는 것을 찾아내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번 부여에서 찾아낸 금동향로가 그 대열에 하나를 더하는 소식이 아닐까 싶어서 더욱 경사로 여겨지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최상 가는 미적 형태는 세계미술사에서도 최상의 곳에 자리하는 것이고, 그것은 인간정신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의 표현을 의미한다. 고려시대의 도자기나 불화 역시 세계미술사의 걸작 대열 일선에 있는 것이고 겸제, 추사 또한 마찬가지 경우이다. 우리는 서양미술에 대해서는 잘 연구가 되어 있는데 정작 내부 문제에 대해서는 미흡한 점이 많이 있다. 이번 금동향로의 출현이 그 점을 일깨우는 큰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자유스럽고 활달하고 자신만만한 기상이 비길데가 드물 것 같다. 거기에 우아한 품격과 사랑과 평화를 구현하고 있었다. 변화무쌍한 조형적 구사력과 깜찍스러운 균제미와 경쾌한 공간감과 지금 살아있고 영원토록 살아 움직일 것같은 모습을 하고 지금 막 날고 있는 형국이었다. 용이 받치고있는 향로의 몸체는 불꽃이고 연꽃봉우리였다. 그것은 생명의 원초적 생동 그것이었다. 감각의 섬세함, 예리한 관찰력,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표현의 절도, 맺힘과 흘러감은 물 흐르듯하고 시작도 안보이고 끝도 안보인다. 어른이면서도 아이스럽고, 어둠을 벗겨낸 맑음과 밝음의 아침…. 아, 이것을 만든 이는 누구일까.

 그 옛날의 백마강 난리가 문득 떠올랐다. 그것은 나만의 심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황산벌 싸움이 떠올랐다. 금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당나라 군병들도 보였다. 낙화암 풍경도 보였다. 궁성의 검은 연기도 보였다. 이 소용돌이 속에 이 금동향로는 우물 속에 갇혀져서 기나긴 잠에 빠졌다. 그러다가 20세기가 다 저물어가는 어느날 세상에 드러나서 내가 지금 예찬을 하고 있는 것인데 한 구석에 있는 그 애처로움이 나의 마음을 흔들고 있다. 역사의 흥망성쇠와 인간의 희비영욕을 비켜서서 아름다움의 영원한 승리를 목격하는 듯도 싶었다.

 아무튼 백제 금동향로의 발견은 민족적인 자긍심을 일깨우는데 큰 역할을 했다. 언제 공개할 것인가에 대해서 전화가 빗발쳤다니 그 일례가 아닌가.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자기 집안 일에 대해 자랑하는 것을 못난짓으로 생각해 왔다. 그것이 지나쳐서 내 나라, 우리 조상들의 훌륭한 업적을 소홀히 여기는 습관이 생겼는데 이 점은 깊이 반성할 일이라고 생각된다. 무조건 추켜서 우월감으로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것도 삼갈 일이지만 남 높은 줄만 알고 나 높은 걸 잊어버리면 그게 바로 열등의식일 것이다. 특히 일제 36년 동안 그런 왜곡된 교육을 받아 왔다. 해방 50년을 보내고서도 아직도 우리는 그 누습을 다 털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반성해 볼일이다.

 아름다움이라는 말 속에는 진실이라는 뜻, 사랑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희망이라는 뜻, 초월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예술이 인간을 구원한다고도 하였다.

 아득한 옛날, 이름 모를 한 예술가의 넋이 우리를 기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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