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아닌 물난리를 겪고 있다. 사람들이 마실 물을 믿지 못한다. 그리고 마음에 의심과 근심이 더해졌다. 물론 이러한 현상의 원인이 다층적으로 규명되어야 한다. 여기서 나는 시를 말하는 논리 위에서, 그 원인을 사람들에게서 사라지고 있는 「시의 마음」에서 찾고자 한다. 시의 마음이 「본디 마음」이라면 그것은 근본을 생각하는 마음이다. 그런데 헛것을 좇고 있는 근대인의 경우, 이러한 마음은 사라지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이 만든 욕망의 사닥다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우리 모두에게 시의 마음의 회복이 필요하다. 근본을 생각할 때이다. 추상의 인간이 아니라 인간됨의 구체에 대한 사색이 많아져야 한다. 이러한 요청은 문학하는 이에게만 한정된것이 아니다. 모두가 새로운 철학을 가져야 하고 새로운 윤리학을 정립하여야 한다. 이것을 달리, 보이지 않는 시로서의 시심의 회복이라 할 수 있다.
소위 시인들의 구체적인 글쓰기로서의 시가 갖는 의의는 근대인의 삶을 반성하게 하고 그 삶에 생기를 더하게 하는것이다. 이것은 시가 삶에 관한 추상적인 명제를 진술하는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감각에 호소하는 데서 가능한 일이다.
심호택의 「자선원」 연작 2편(「녹색평론」 1·2월호)을 읽는다. <원불교 자선원> 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이다. 그 사람들은 모두 불구이다. 그러나 그들은 천진성의 웃음을 간직하고 있으며 본디의 착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들이 만든 <도마> 며 그들이 농사지은 <오이> 등을 사가지고 오면서 시적 화자는 한편으로 부끄러운 마음을, 다른 한편으로 그들에게서 영성을 느낀다. 왜 이러한 느낌을 갖게 되었는가. 그들이 본디 마음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은 <나팔꽃 벙글어 찬란한 유월의 아침> 과 같고, <하늘나라 햇살> 과 함께 한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우리의 삶이 되지 못한다. 안타까운 마음이다. 하늘나라 햇살> 나팔꽃 벙글어 찬란한> 오이> 도마> 원불교 자선원>
시인의 연작 시편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다른 데 있는것이 아니라 시인의 일상 속에서 요동하는 마음의 무늬에 있다. 이러한 무늬는 근본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형성된다. 이것은 우리들의 몸 속 구석구석에 생기를 주는 실핏줄과 같다. 「자선원」 사람들과의 만남이 일상 속에 매몰되어 있던 시적 화자의 본디 마음을 되살려 낸다.
그런데 우리를 압도하고 있는 일상은 근본을 생각하는 마음들을 앗아간다. 시장의 욕망들과 헛된 가치들이 삶을 옭아매고 있기 때문이다. 시의 마음을 일상과 생활세계의 구체 속에서 되살리는 운동이 필요하다. 생태환경의 오염을 보더라도 그러하다. 이것을 남의 탓으로 돌릴 일이 아니다. 모두의 마음에 본디의 마음이 없다는것을 아프게 인식하여야 한다. 새로운 철학이나 윤리는 사람들 간의 철학·윤리만을 말하지 않는다. 사람과 사물, 사람과 기계, 사람과 자연간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철학·윤리이다.<문학평론가>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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