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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 인도 거절에 자객파견/일본망명:상(개혁풍운아 김옥균: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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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 인도 거절에 자객파견/일본망명:상(개혁풍운아 김옥균:10)

입력
1994.0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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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영·장은규 현지잠입 편지로 유인/암살음모 눈치채고 수하시켜 역공작/일,안전보호 요청 외면 “금은 평화에 장애” 고도추방 김옥균의 머리카락이 묻혀 있다는 일본 도쿄 분쿄구의 신조지(진정사)는 도쿄대학에서 5백쯤 떨어진 주택가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다.

 정문을 들어서자 본당으로 이어진 길 오른쪽에 빽빽히 들어 찬 수백개의 묘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김옥균의 묘도 저 가운데 있겠지」라는 취재진의 생각은 빗나갔다.

 그의 묘는 다른 것들과 뚝 떨어져 본당과 이어진 주지의 살림집 뒤에 있었다. 다른 묘비의 서너배나 되는 그의 묘비는 태평양전쟁 때 비행기의 폭격을 받아 윗부분이 부서졌지만 높이 3가 넘는 제법 웅장한 규모였다.

 「조선국 김옥균군지묘」라고 쓰인 묘비가 바위 위에 우뚝 서 있고 그 뒤로 부서진 묘비의 윗부분이 보였다. 부서져 나간 묘비에는 원래 「대조선국…」에서 떨어져 나간 「대」자가 외롭게 있었다. 그 묘비 앞에 그를 사모했던 가이쿤지의 작은 묘도 보였다. 가이쿤지는 김옥균의 참수된 머리를 일본으로 비밀리에 옮겨지게 한 장본인이다.

 치도세마루호의 쓰지선장의 보호로 식당 마루 밑에 숨은 김옥균과 개화파요인들은 1894년 12월11일 제물포항을 떠나 이틀만에 일본 나가사키(장기)항에 도착했다.

 김옥균의 이름은 이와다 슈사쿠(암전주작)로 바뀌었다. 쓰지선장이 그의 개혁과업이 거친 돌밭을 일구는것과 같다는 의미로 지어 준 일본이름이었다.

 나가사키에서 머무르는 동안 동행한 일본공사관 직원 이노우에(정상각오랑)는 김옥균과 절친한 거물정치인 후쿠자와 유기치(복택유길)에게 전보를 친 뒤 갑신정변의 전모를 일본정부에 보고했다.

 12월 하순 김옥균은 도쿄 미나토구 미타(삼전)에 있던 후쿠자와의 집에 도착했다.

 <『무사해서 다행이오』 후쿠자와는 대문까지 나와 이들을 맞았고 김옥균과 후쿠자와는 굳은 악수를 했다. 그리고 늦게까지 불이 밝혀진 후쿠자와의 집에서는 이들의 무사함을 축하해 터뜨리는 샴페인 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고 계속들려왔다> (「후쿠자와 유기치 전기」 3권에서)

 그러나 후쿠자와의 환대도, 그 집에 머무르던 한 달 동안 끊이지 않던 고토(후등상차랑) 도야마(두산만) 이쿠노(적야반개) 이누카이(견양의)등 일본 거물정치인과 유명인사들의 발걸음도 잠깐이었다.

○떠돌이 피신생활

 이들의 관심과 애정은 점차 무관심과 동정으로 바뀌어갔고 일본정부의 태도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해 갔다. 그를 한반도침략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일본의 우익정객들이 간혹 그의 거처를 찾아들 뿐이었다.

 교포학자 금병동씨(일본 조선대강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당시 후쿠자와를 비롯한 일본의 진보적인 정치인들(자유민권파)은 당초부터 한국에 대한 무력침략을 획책하던 일본정부에 반발해왔습니다. 그들은 김옥균같은 개화파를 통해 한국을 개방시켜 평화적이고 문화적인 방법으로 한국을 지배하는 정책을 추구했지요. 따라서 그들의 전략에 「파산선고」를 내린 갑신정변의 실패는 자신들에게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고 김옥균은 애석하게도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일본망명이 더 이상 김옥균의 안전을 보장하는것은 아니었다. 김옥균의 망명초기부터 인도를 요구하던 조선정부는 1885년 2월19일 드디어 대사를 일본에 파견했다.

 대사 서상우와 부사 묄렌도르프는 요시다(길전청성)외무차관을 수차례 만나 김옥균과 박영효의 인도를 강력히 요구했고 3월19일에는 이노우에 외무대신에게 인도요구서를 공식적으로 제출했다.

 일본정부는 조일간에 범죄인인도조약이 체결돼 있지 않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지만 공식적인 소환요구 이후 김옥균은 한 곳에 거처를 정하지 못하고 떠돌이 생활을 해야했으며 동지들도 흩어졌다.

 대신의 파견사실이 알려진 뒤 한 달 동안 도쿄 아사쿠사지(천초사)에 숨어지내던 개화파요인들은 흩어졌고 김옥균은 요코하마와 고베·쿄토·오사카등을 떠돌았다. 그 해 4월26일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은 미국으로 떠났다. (박영효는 1886년 5월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다)

 국제적인 체면과 김옥균 인도로 파생될 손익을 계산한 일본정부의 인도거절로 개화파요인들은 망명 이후 최대의 위기를 넘겼으나 복수심에 불타는 민씨일파의 인도요구는 다시 암살계획으로 이어진다.

 이때부터 일본에서의 쫓고 쫓기는 드라마가 10년간 계속된다.

 1886년 2월23일 제물포항을 떠난 미노마루(미농환)호에는 한국정부로부터 김옥균 암살지령을 받은 통리군국사무아문 주사 지운영이 타고 있었다. 나가사키(장기)를 거쳐 고베(신호)에 도착한 그는 자객 장은규를 만나 김옥균에 관한 정보를 들었다.

 그러나 지운영의 고베 도착부터 강제추방된 6월23일까지 일본에서 그의 행적은 일본경찰에 포착돼 일거수일투족이 보고되고 있었다.

○연기신청도 허사

 도쿄 록봉기(륙본목)의 외교사료관에서 찾아낸  2천여쪽이 넘는「한국망명자 김옥균의 동정관계잡건」(전3권) 가운데는 우치미(내해충승) 고베현령이 이노우에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서등 지운영 사건관계 보고서들이 다수 들어 있다.

 <오사카의 여관을 한 달 이상 전세 낸 지운영과 장은규는 여관방에 틀어박혀 일본 지도들을 들고 하루종일 암살을 모의했고 외출은 밤에만 했다. 나라·쿄토등으로 거처를 옮기며 암살계획을 짠 지운영은 5월1일 도카이도(동해도)를 따라 김옥균의 거처가 있는 도쿄 교바시구에 잠입한다>  (「한국망명자 김옥균의 동정관계잡건」중에서)

 여관을 아지트로 정한 지운영은 김옥균에게 면회를 요청하는 편지를 뛰워 본격적인 김옥균 암살에 착수한다.

 그러나 암살은 쉽지 않았다. 그의 파견을 알고 있던 김옥균이 부하 유혁로 신응희 정란교와 함께 이미 역공작을 준비하고 있었던것이다. 김옥균의 지시를 받은 이들은 『김옥균을 죽여 공을 세우고 싶다』며 지운영에게 접근했고 이를 믿은 지운영은 자신을 포적사로 임명한 고종의 위임장과 단도를 보여주었다.

 김옥균은 즉시(6월1일) 이들이 지운영을 속여 빼내온 증거품들과 함께 신변안전을 요구하는 편지를 이노우에 외무대신에게 보냈다. 그러나 또한 그에게 돌아온것은 안전보장조치가 아니라 국외 추방명령서였다.

 <국사범 김옥균의 일본체류는 일본정부와 조선정부의 불화를 조성할 뿐 아니라 일본의 치안을 방해하고 외교상의 평화를 방해한다. 김옥균은 이 명령서를 받은 다음날로부터 15일 이내에 일본을 떠나야 하며 이후 일본 영토에는 들어 올 수 없다>

 야마가타 내무대신의 추방명령서는 김옥균에게 오키(충수) 가나가와현령을 통해 전달됐다. 두번이나 연기신청을 낸 김옥균은 7월26일 요코하마 이세야마(이세산)에 있는 재벌 미쓰이(삼정)의 별장 공중원에 13일동안 강제 억류됐다. 김옥균은 결국 8월9일 도쿄 시나가와(품천)항구에서 절해고도 오가사와라(소립원)섬으로 떠나는 히데사토마루호에 강제로 태워졌다.<도쿄=글 서사봉기자 사진 손덕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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