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르 가이다르부총리의 사임은 러시아정부내 개혁정책을 둘러싼 노선투쟁에서 개혁진영이 처한 현실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개혁은 도처에서 입버릇처럼 얘기되고 있으나 명확한 개혁프로그램을 찾아볼 수 없는 게 러시아의 상황이다. 정부내 개혁주의자들은 자리보전을 위해 싸우든가 물러나 건설적인 야당세력으로 남든가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그들은 긴축정책을 통한 급진개혁 대신에 국영기업에 대한 보조금지급등 인플레를유발할지도 모를 정책의 잘못이 명백히 드러날 때까지 기다려야 할것이다.
가이다르의 사임은 개혁주의자들뿐 아니라 옐친대통령에게도 심각한 딜레마를 안겨주었다. 가이다르의 자리에 그에 버금갈만한 개혁주의자를 앉히지 않는다면 서방의 지원은 물론 민주주의와 시장개혁의 옹호자로서 자신의 이미지가 크게 훼손될것이다. 한편으로 정부내 온건개혁파들을 사임시키고 급진개혁으로 몰아붙이면 충격요법식 급진개혁과 그에 따른 부작용으로 대중들의 항의시위는 빈발할것이다. 이 틈을 비집고 권력복귀를 노리는 반동세력들이 기회를 잡을것은 분명하다.
지난해 12월 총선에서 「러시아의 선택」을 비롯한 개혁세력들이 패배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가이다르부총리가 사임하는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가이다르를 비롯한 개혁진영의 결정적인 실책들이 총선결과 드러났다. 즉 대중들에게 러시아의 당면문제들에 대한 자신들의 해결방안을 분명히 인식시키는데 실패했던것이다.
이런 상황이 온건개혁노선을 추구하는 빅토르 체르노미르딘총리의 입지를 강화시켜주었다. 옐친대통령과 체르노미르딘총리는 오랜 협의끝에 온건개혁론자들을 새 내각의 핵심적인 자리에 앉혔다. 체르노미르딘총리는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킴으로써 고집스럽게 주장해온 긴축예산정책의 완화와 사회보장정책이 가미된 경제정책을 실현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체르노미르딘총리가 이끄는 새 각료팀은 시장경제개혁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충격요법식 개혁정책으로 피해를 입은 대중들을 보상해주는「제3의 경제개혁의 길」을 찾아야 한다.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중대한 시점에 직면해 있다. 러시아는 조만간 경제발전과정과 방향을 결정해야 할것이다. 러시아공산당의 겐나디 주가노프와 극우민족주의자 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는 정부내 개혁진영의 퇴조를 반기고 있다. 서방 각국들은 이런 상황 때문에 대러시아정책들을 재고할지 모른다.
옐친대통령은 가이다르의 사표를 수리하면서 자신과 전러시아의 이해가 온건개혁론자인 체르노미르딘총리에 달려있다고 판단했다. 이런 판단에는 지난 2년간 추진해온 충격요법식 급진개혁이 국민들의 반발을 초래했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서방 각국은 러시아정부내 개혁세력의 입지약화를 이유로 강경 대응해서는 안된다. 물론 개혁과 변화의 기수 옐친대통령을 지나치게 믿으면 실망스러운 점도 적지않을것이다. 하지만 옐친대통령은 지난해 총선에서 지리노프스키와 공산주의자들의 대성공으로 개혁의 속도에 브레이크를 걸지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개혁의 일시적인 완급조절일뿐 개혁의 포기가 아니다.
옐친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체르노미르딘총리도 모든 금융규제를 풀어 인플레를 부추기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는 경제개혁의 부작용 특히 실업을 완화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고있다.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중앙은행의 루블화 남발을 막는것이다. 이와 함께 경제안정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려서는 안된다.
새 경제정책은 국영기업 및 농업에 대한 지원확대, 인플레보전등 정부의 보조금지급이 주요 근간을 이룰것이다. 서방경제학자들은 새 경제정책이 가격통제와 관세증가를 불러올것이라고 말한다. 긴죽재정정책이 사라지면 서방선진 7개국(G7)은 러시아에 약속한 차관원조를 동결시킬지도 모른다.
그러나 러시아정부에 정통한 어떤 소식통들도 기업의 사유화 프로그램에 대한 중단을 언급하지 않는다. 러시아개혁에 대한 「부음기사」를 쓰는것은 확실히 이르다. 체르노미르딘총리는 많은 난관에 봉착할지라도 온건 개혁작업을 계속할것이다.
러시아개혁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개혁을 완성하려면 수년이 걸리겠지만 이미 시장은 불완전하나마 형성됐다. 심지어 가장 완고한 보수주의자들도 개혁을 단지 방해할 순 있어도 파괴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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