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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통일열정 절실히 필요한때인데…/문익환형 영전에/계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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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통일열정 절실히 필요한때인데…/문익환형 영전에/계훈제

입력
1994.01.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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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익환형. 형의 비보를 듣는 순간 저는 믿었던 하늘이 이렇게 비정할 수가 있을까 하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이 어느 때입니까. 꼭 문형이 계셔야 하고 문형이 앞장서 해야 할 민족적 과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시점인데 도대체 어인 일이십니까. 

 지난 75년 8월 장준하형의 원통한 죽음을 앞에 놓고 백기완형의 권고로 장형이 하시던 일을 떠맡으며 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나의 벗 윤동주는 일제와 싸우다 갔고 장형은 분단독재와 싸워 통일을 이룩하려다가 가셨다. 그러는 동안 동시대를 살아오는 사람으로서 열등감도 없지 않았는데 이제 나에게도 죽을 자리를 고를 기회가 생겼구나』하고 빙그레 웃던 그 모습입니다. 그뒤 문형은 감옥을 제 집 드나들듯 했습니다. 또 분단의 지뢰밭을 맨발로 넘나드는 동안 갖은 박해와 혹 비난도 받았지만 통일되는 그날까지 당당히 서계실 줄 알았는데 이게 도대체 웬 말입니까. 

 그동안 감옥에서 익힌 인술로 구속자가족을 만나면 병을 돌보아 주시고 특히 늘 골골하는 나의 건강을 돌봐주시더니 한 생명의 운세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결국 자기 걱정보다도 남의 걱정을 더해주고 자신을 위해서보다도 이 겨레의 통일을 위해 마른 자리 진 자리 가리지 않고 뛰어다니시느라 사실은 일에 치인 것이지 문형은 결코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문형! 문형은 이 고난의 현실에 태어난 사람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었습니다. 문형이 좋아하시던 윤동주의 서시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없이 사신 것이 그것입니다. 또 문형은 오늘날 우리들이 처한 이 고난의 현실에 가장 앞장서 대결해왔다는 점에서 민족적 모범을 일구셨습니다.

 문형 그 일제때 말입니다. 그때 일제에 빌붙어 돌아가던 뻔뻔스러운 반역자들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때 문형은 일제와 적극 항전은 못하셨더라도 민족적 긍지를 가지고 청년시대를 보냈습니다. 분단을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굳혀가던 유신독재, 전두환 노태우독재시대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땅의 민주화물결을 저버렸습니까. 그러나 문형은 앞장서 그 분단독재와 싸우셨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제부터 문형이 기여해야 할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국제화물결의 허상을 깨고 통일의 실체와 통일운동의 실체를 바로 하는 중대하고 까다로운 문제들입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문형의 오랜 경륜과 지혜와 헌신이 필요했었는데 아, 이게 웬말입니까. 

 오늘 아침엔 백형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원통하게 돌아가신 문형을 땅에 묻는데 앞장서는 장례위원장은 못하겠다고. 이 얼마나 안타까운 심정들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문형의 육신을 땅에 묻을 수 밖엔 없어도 문형이 헤쳐온 이 겨레의 갈 길은 땅에 묻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백범이 가고 장준하가 가고 문익환이 간 길,통일의 길을 많은 사람들이 뒤따를 것입니다. 산새 들새들은 우짖고 곧 얼었던 땅이 녹으며 싹이 트고 꽃이 피고 대지가 열리는 통일의 그날. 문형! 우리 장형을 비롯한 숱한 통일꾼들과 만날 그날까지 우리 지금껏 가던 길을 그대로 가자고 다지는 붓끝만 떨립니다.<문익환목사 장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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