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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야인의 저항정신(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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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야인의 저항정신(사설)

입력
1994.01.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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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랫동안 독재체제에 맞서 분연히 투쟁해왔던 재야와 운동권의 명실상부한 지도자요 대부였던 문익환목사의 갑작스런 별세로 이 나라 재야운동사의 한시대·한페이지가 넘겨졌다. 사실 민주주의와 민주정치가 제대로 운영되는 사회와 국가라면 재야니 운동권이니 하는 세력이 나올 필요도 없고, 또 그런 말 자체도 생겨나지 않았을것이다. 따라서 문목사 역시 목회자로, 신학교수로, 교계의 지도자로 우뚝하게 일어섰을것이다.

 그러나 박정희정권은 1972년 10월 유신독재체제를 선언, 5·16쿠데타에 이어 또다시 민주주의를 짓밟았고 이에 뜻있는 학자 종교인 법조인등 지식인과 문화예술인들이 오직 량심과 정의를 무기삼아 감연히 투쟁에 나섰을 때 문목사도 적극 가담했음은 알려진대로다.

 암울했던 유신과 80년대의 군사독재기간 문목사가 소위 명동 3·1 구국선언을 비롯하여 재야의 반독재투쟁 때마다 빠짐없이 앞장섰음을 국민은 기억하고 있다. 실로 문목사의 한평생은, 일제때는 신사참배거부, 조국분단후에는 통일운동과 반독재운동등 파란만장한 저항과 투쟁으로 점철됐다고 볼 수 있는것이다.

 문목사등 재야의 투쟁 때마다 역대 권력자들은 체제를 뒤흔드는 유해한 세력, 즉 반정부·반국가사범, 이적행위로 낙인찍어 투옥했으나 대다수 국민들은 이들이 권력이나 명리등에 아무런 욕심이 없이 오직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고 자기를 희생했기에 그 순수함에 마음속으로 지지와 성원을 보냈던것이다. 문목사 역시 6차례 투옥으로 10여년 넘게 옥중생활을 했고 그래도 결코 신념을 꺾지않았던 그의 투지는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물론 모든 국민이 문목사가 한 일과 행동에 지지와 박수를 보낸것은 아니다. 때로는 걱정하고 실망하고 놀라기도 했었다. 걱정한것은 당국의 물리적 탄압에 반발한것이긴 하나 재야가 폭력등 과격한 시위를 벌인것이고 실망한것은 87년12월 1노3금이 나섰던 대통령선거때 야당후보단일화가 불발되자 문목사등은 당시 재야세력의 집결체인 민통련이 량금씨중 한쪽을 지지케 하여 혼선을 가중시킨것이며, 더욱 놀란것은 89년 정부의 허가없이 방북, 김일성과 회담을 가진것이다. 아무리 동기는 순수했더라도 그의 앞선 행동에 국민들이 안타까워했던 것도 사실이다.

 문목사는 갔지만 그가 필생의 신념으로 벌여오고 남긴 민주주의 정착과 통일실현의 과제는 우리 모두가 해결해야 할 엄숙한 숙제이다. 문목사는 우리의 아픈 역사의 산물이었다. 다시는 반민주적인 불행한 역사가 재현되어서는 안될것이다. 재야에 몸담고 있는 모든 사람들도 30년만에 문민정부가 부활된만큼 과감한 방향전환을 모색, 새로운 자세로서 의식개혁을 위한 시민운동, 민주화뿌리내리기, 그리고 온국민이 안심하고 박수를 보낼 수 있는 합리적인 통일운동을 전개해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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