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로를 당당하게 활보하는 소설은 줄고 오솔길을 조용히 산책하는 소설이 늘고 있다. 역사의 움직임이나 사회적 틀의 변화에 눈독 들이는 작품들보다는 개인의 복잡한 내면세계나 이런저런 사연을 뒤지는, 말하자면 「작은 세계」를 고집하는 작품들이 최근 우리 소설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거대이론의 퇴조나 신세대문화론의 부상과 짝을 이루는 문학적 현상이라 할 만하다. 그런즉 새로운 정신적 출구와 문화적 진로의 모색이 촉발하는 현상으로 이를 해석할 수도 있을 터이다. 그러나 우리가 절실하게 바라는 소설은 작은 세계만을 고수함으로써 개인의 구체적 삶을 드러내는 데 그치는 소설이 아니라 그런 삶을 통해 인간의 심연을 밝히고 인간과 사회 또는 인간과 역사의 유대를 해명하는 소설이다. 그런 소설에 필수적인 것은 물론 예민한 감각과 날카로운 지성이다. 고종석의 첫 장편소설 「기자들」은 바로 그 두 요건을 갖춘 보기드문 소설이다. 고종석은 이미 기자로서 기사라는 통념에 도전적인, 그러니까 독창적인, 문학기사를 많이 썼기 때문에 기사라는 글에 만족할 수 없는 체질과 또 이를 뒷받침할 만한 재능을 지닌 사람임을 예고하였는데 이런 예고대로 그는 「기자들」을 마침내 선보였다. 이 작품은 최근 유럽에서 전개된 무쌍한 변화를 실제대로 풍성하게 수록하고 있다. 이는 작가가 유럽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소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정보를 해독하는 힘이 큰 지성인임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지만 어쨌든 그것은 세미나와 취재를 그 두 축으로 삼는 「유럽의 기자들」 프로그램에 참석한 기자를 통해 드러난다. 여기서 우리는 이 소설이 교양의 증진과 지성의 개발을 우선적으로 겨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기자의 보도와 논평을 듣고 우리는 세계사적 움직임의 실상을 읽고 그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교양의 증진과 지성의 개발을 목표로 설정하는 소설은 건조한 설교와 지루한 계몽의 늪에 빠지기 쉬운데 이 작품은 이런 늪을 잘 벗어남으로써 독자의 지적 저수량을 넓히고 지성적 감식안을 키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어떻게 그런 늪을 무사히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일까. 작가는 이 작품에서 언어에 특별한 관심을 쏟고 있는 사람이자 「김현 중독자」답게 유연한 문체를 구사함으로써 또 화제를 신속하게 교체함으로써 그 늪을 피할 수 있었다. 화제를 신속하게 교체하였다는 것은 작가가 실화를 늘어놓다가도 독자가 이에 싫증이 날 만하면 흥미진진한 허구를 재빨리 첨부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이 허구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주인공과 동료기자들의 우의와 애정이다. 특히 장인철과 헝가리 여기자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동독의 일로나와 인철의 연애는 이 소설의 향기다. 그밖에 비를 좋아하는 주인공이 서점에서 「의적질」한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친구 인숙과 주인공의 아내였던 소설가는 누구일까 하는 궁금증도 이 소설의 흡인력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이 소설의 흥미를 돋우는 이런 점들은 물론 작가의 예민한 감각의 산물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독자를 즐거운 의식화의 길로 유혹하는 특이한 지식인 소설이다.<문학평론가>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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