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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분단­독재 온몸으로 저항/타계한 늦봄 문익환목사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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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분단­독재 온몸으로 저항/타계한 늦봄 문익환목사 일생

입력
1994.01.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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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옥 5차례 12년 출소후도 “통일맞이사업”/14세때 신사참배거부 퇴학도… 가시밭 외길 18일 타계한 「재야 민주화·통일운동의 대부」 늦봄 문익환목사는 일제 식민지치하,해방과 분단,군부독재등으로 점철된 우리 현대사의 가시밭길을 온몸으로 정면돌파해온 시대의 양심이었다.

 민주인사, 통일운동가, 혁명가, 빨갱이, 시인, 몽상가등 그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제 각각이지만 그가 오로지 역사와 민족에 비추어 본 자신의 양심적 판단에 따라 시대의 질곡을 헤쳐왔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문목사는 지난해3월까지 5차례, 12년이 넘는 옥중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뒤에도「통일맞이 사업」의 구상과 실행을 위해 노심초사해왔다. 통일운동이 기존의 재야명망가들만을 중심으로 해서는 실효를 거둘 수 없으며 광범한 대중적 지지기반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 그가 새로 구상한 통일맞이 사업이었고 지난해5월 서울 종로구 낙원동에 사무실을 마련,구체적 실천을 도모했다.

 이렇게 노익장을 과시했던 문목사는 18일하오3시께 급체 기미를 보여 자택으로 돌아왔다가 갑자기 쓰러졌다.

 문목사는 1918년 선친 문재린목사의 장남으로 만주 북간도에서 태어나 항일시인 윤동주와 명동학교를 함께 다녔다. 3·1독립만세사건으로 투옥됐던 부친, 그의 베갯머리에 태극문양을 수놓아주며 애국심을 가르쳤던 모친 김신묵여사(90년 타계)의 영향을 받고 자란 그는 평양숭실학교를 다니던 14살때 신사참배거부로 퇴학당하기도 했다.

 38년 간도를 떠나 43년 일본신학교를 졸업한 뒤 귀국, 47년 조선신학교를 마친 문목사는 55년 미국으로 유학, 프린스턴신학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후 한빛교회목사 한신대 교수를 역임하던 70년대초까지는 빼어난 신학자에 시인이었다. 그의 호 늦봄은 뒤늦게 시를 알고 사회운동에 투신한 것을 표현한다.

 그가 민주와 통일의 목소리를 한몸에 대변하는 재야인사로 변신한 계기는 75년8월 고 장준하선생의 죽음이었다. 76년 3월 『민주화만이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 「3·1민주구국선언」으로 첫 옥고를 치른 문목사는 79년12월까지 석방과 재수감을 되풀이했다.

 80년5월 계엄치하에서 「YWCA위장결혼사건」으로 구속, 86년5월에는 인천사태와 서울대의 과격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4번째 영어의 몸이 돼야 했던 그는 87년 청주교도소 수감당시 박종철군의 죽음을 애도하는 단식을 하기도 했다. 이후 민통련의장으로 있던 문목사가 재야통일운동의 극명한 상징으로 부각된 것은 89년3월의 방북과 김일성주석 면담이었다. 일행2명과 함께 돌연 방북한 그는 『우리 민족의 지상과제는 통일』이라고 절규했지만 격렬한 국내외의 비난에 직면해야 했고 귀국후 구속,징역7년을 선고받았다. 90년3월 어머니의 죽음으로 임시출소하기도 했던 문목사는 지난해3월 특별감형으로 석방됐다.

 문목사의 통일론은 남북이 상호체제를 인정하는 연방제3단계론. 통일의 전제조건으로 지배세력으로부터의 민주화,외세로부터의 민족자주화를 주장하며 민주화·민족자주화·민족통일의 3위일체론을 편 그의 통일론은 대학가를 비롯한 재야통일운동세력의 구심점이었다.

같은 일생으로 문목사는 92년 1월 미국친선협회에 의해 노벨평화상후보로 추천되기도 했다.【하종오·남경욱기자】

◎재야·사회단체 대표들 밤새 줄이어/문목사 빈소주변

 ○…문목사의 빈소가 마련된 한일병원 영안실에는 하오9시께부터 부음을 듣고 달려온 재야인사와 사회단체대표, 친지들의 발길이 밤새 줄을 이었다.

 임시빈소를 찾은 계훈제 백기완 장기표 김근태씨, 함세웅신부 서경석목사등 주요단체 대표 2백여명은 문목사의 타계를 애도하며 고인을 추모했다. 이들은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이렇게 가십니까. 목사님』 『그렇게 고생하시다 좋은 세상이 왔는데 이렇게 돌아가시다니 웬일입니까』고 오열했다.

 하오10시30분께는 북한을 방문했던 림수경양이 찾아와 미망인 박용길여사를 부둥켜안고 『죄송합니다』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문목사의 장남 호근씨는 『아버지가 오랜 수감생활로 몸이 쇠약해졌음에도 지난해 3월 출옥후 곧바로 통일운동을 재개,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통일맞이 운동」 사무실에 나가셨다』면서 『시간을 쪼개 전국 각지를 돌며 강연을 하는등 고령에 무리한 활동을 하셔 피로가 누적됐던것 같다』고 말했다.

 ○…영안실을 관리하고 있는 이정구씨(60)는 『3년전 문목사의 어머니도 이 곳에서 돌아가셨고 문목사도 잘 알고 있다』며 손수 국화 1백여송이로 빈소 주변을 단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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