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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근대화 불씨만 남기고…/삼일천하:하(개혁풍운아 김옥균: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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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근대화 불씨만 남기고…/삼일천하:하(개혁풍운아 김옥균:9)

입력
1994.01.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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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군 천백명 창덕궁난입 “개혁진압”/김옥균의 “제물포 피신”주청 고종거절/개화파 11명 우편선타고 일본 망명길로 김옥균과 서광범은 숨이 턱에 닿도록 달음질해 고종의 뒤를 쫓아갔다.

 『전하! 지금 떠나셔서는 안됩니다. 잠깐 여기에 멈추시기를 소신이 천만 바라옵니다』

 김옥균은 애원하고 있었다.

 궁중이 혼란한 틈을 타 왕비, 세자, 세자빈은 이미 북산(북한산)으로, 왕대비, 대왕대비는 북묘(종로구 명륜동에 있던 척한의 장수인 관우 사당)로 빠져나갔고 고종도 대왕대비의 뒤를 쫓아 북묘로 가는 길이었다. 창덕궁의 동쪽과 남쪽으로 1천2백명의 청국군이 사나운 기세로 쳐들어오고 있었다.

 고종은 김옥균의 울음섞인 청을 차마 뿌리치지 못했다. 고종은 그 자리에 자리를 깔게 하고 좌정했다. 청군이 쏘아 대는 총탄이 「쌩-」소리를 내며 전각과 아름드리 나무에 날아와 박혔다.

 해는 어느덧 인왕산에 걸리고 막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평상복인 명주 겹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고종의 창백한 얼굴이 점점 약해지는 저녁 햇살에 붉게 물들었다. 초췌한 고종의 모습을 보자 김옥균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두 사람은 땅에 엎드렸다. 눈물이 흘러 옷깃을 적시고 있었다.

 『전하! 청군이 이같은 경거망동을 저지른것은 모두 소신들이 용렬한 탓입니다. 그러나 아직 소신들이 있고 일본 군대와 신정부군이 대궐을 수비하고 있으니 걸음을 멈추옵소서』

 억지 반, 설득 반으로 고종을 모시고 산 아래 연경당(창덕궁 중앙에 있던 집)으로 내려온 김옥균은 급히 행동대원 변수를 시켜 다케조에 일본공사를 불러오게 했다. 이때 창덕궁 안은 총탄이 비오듯 퍼부어 사람이 다닐 수도 없었다.

 창덕궁을 나서던 고종을 급히 다시 모셔온 김옥균은 사태수습을 위해 몸소 부대지휘에 나섰다.

 『선인문에 있던 조선군사들은 다들 어디로 갔느냐?』

 『영문에서 총이 오기를 기다리며 맨주먹으로 버티다가 모두 도망쳤습니다』

 김옥균은 신음 외에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눈 앞이 캄캄해졌다. 조선군사는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있다가 도망쳐 버린것이다. 일본군은 불과 2백명이고 청군은 1천2백명이니 이 일을 어찌할것인가!

 귀를 찌르는 듯한 총소리, 육박해 들어오는 청군,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

 개혁을 위한 모든 구상이 저 원수같은 청군들 때문에 수포가 되는구나…(갑신일록). 형세를 만회할 계책이 없었다. 분과 회한이 온몸을 휩싸고 있었다. 「그러나 끝까지 싸워보자! 기어이 목적을 이뤄보자」는 다짐이 가슴 한편에서 솟아 올랐다.

 이 때 변수가 다케조에 공사와 함께 왔다.

 『공사! 이제 도리가 없으니 전하를 급히 인천으로 모시고 다음 계책을 도모하는것이 좋겠습니다』

 그는 파천만이 개화파가 회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다케조에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공사에게 지금 무어라고 이야기하였소?』

 고종이 김옥균에게 물었다.

 『소신이 생각컨대 일이 이처럼 절박하게 되었으니 전하께서 잠시 인천으로 파천하신 뒤에 뒷일을 도모하는것이 안전할것 같습니다』

 김옥균이 조심스런 목소리로 대답했다.

 『인천으로 가다니, 안될 말이오. 나는 인천으로는 아니 가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대왕대비와 함께 있겠소』

 김옥균이 다시 어찌할 바를 몰라 동지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모두 창백한 얼굴에 낙담한 빛이 뚜렷했다.

 김옥균은 궁궐의 사정을 살피고 돌아온 박영효와 비밀리에 대책을 논의한 뒤 임금 앞에 다시 나갔다.

 『대궐 안은 이미 청군이 점령한 상태입니다. 이제 부득이 인천으로 파천하는 도리 밖에 다른 계책이 없사옵니다. 일본공사 또한 전하를 모시고 인천까지 갈것이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임금이 두 신하의 간곡한 제의에 대답을 못하고 있을 때, 다케조에가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제가 전하를 호위하는것이 도리어 전하를 위험하게 하는것 같으니, 군사를 데리고 잠시 퇴각했다가 대책을 다시 강구하는것이 좋을 듯합니다』

 김옥균은 공사의 말에 또 한번 놀랐다.

 『그게 무슨 말이요, 우리들이 전하의 북묘행을 강력히 만류한것은 공사가 호위하고 있기 때문인데 지금 철군한다면 어쩌란 말씀이오?』

 고종이 옆에서 듣는것도 개의치 않고 김옥균은 일본말로 공사에게 대들었다.

 『그렇지 않소. 지금 산 위에서 총을 쏘는 군사는 청군이 아니라 조선군사입니다. 조선군사가 전하를 향해 총을 쏘는 이유는 일본 군대가 전하를 호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옥균이 이 말에 항변하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을 때 일본통역이 공사의 말을 번역해 고종에게 전달했다.

 『그러면 나는 북묘로 가겠소』

 임금을 모시고 북묘로 갈것인가? 북묘에는 청병이 매복해 있을것이다. 그들 손에 목숨을 잃는것은 너무도 의미없는 죽음이 아닌가.

 『대감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희들은 다케조에 공사를 따라 밖으로 나가겠습니다. 전하를 모시고 싶은 생각은 간절하지만 뒷일을 생각하면 도저히 북묘로 갈 수 없습니다』

 김옥균은 홍영식을 보고 목멘 소리로 말했다.

 『나는 끝까지 남아 전하를 모시겠습니다』

 『대감 뜻대로 하시오. 대감만은 북묘로 간다해도 신변이 무사하실것도 같습니다. 만일 대감이 전하의 곁에 항상 있고 내가 밖에 나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반드시 우리의 뜻을 회복할 날이 있을것이오』

 김옥균과 홍영식의 마지막 대화였다.

 김옥균은 눈물을 머금고 다시 고종 앞에 나아갔다.

 『소신들은 여기서 하직하겠습니다…. 전하! 전하께옵서는 천만 자중하셔서 옥체를 보존하옵소서』

 <…우리는 지붕에 올라가 퇴각하는 일본인들의 행진을 눈여겨 보았다. 이열종대로 늘어선 행렬의 앞줄은 병사들이, 후미는 무장을 한 민간인들이 호위하고 있었다.

 그 행렬 가운데 세 대의 가마가 줄지어 가고 있었다. 바로 그 가마에는 공사관에 피신했던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이 타고 있었다 한다.

 이들의 퇴각은 전혀 방해를 받지 않고 진행됐다. 이 행렬이 서대문에 이르렀을 때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문을 지키고 있던 세명의 병사 중 둘은 도망쳤고, 한명은 끝내 버티다 일본병사의 칼에 쓰러졌다.

 서대문은 폭력에 의해 열렸고, 이 퇴각대열은 장안을 빠져나가 한국인 동지들을 데리고 제물포로 빠져나갔다…>

 갑신정변 당시 묄렌도르프의 참모로 인천해관에 근무했던 독일인 FH 뫼르셀은 「THE KOREA REPOSITORY」(1897년 간행)에 연재한 「갑신정변 견문기」에서 개화파의 초라한 퇴각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1884년 12월9일 새벽 제물포항.

 『여러분! 대단히 미안하지만 이 배에서 내려야겠소. 귀국 국왕의 칙명이고, 여러분의 일본망명이 외교문제로 비화되면 제 입장이 곤란합니다』

 다케조에 공사가 개화파요인 11명이 일본망명을 고대하며 숨어있던 일본 우편선 치도세마루(천세환)호로 돌아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공사! 그런 말이 어디있소. 지금 여기서 육지로 내려가라는 말은 죽으란 소리 아니요』

 다케조에의 완강한 요구에 고민하던 김옥균은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선장을 찾아갔고, 개화파지사들을 동정한 치도세마루호 선장의 승락으로 이들은 이틀 뒤 현해탄을 건넜다.

 근대적인 자주독립국가의 건설이라는 개화파의 이상과 야심찬 개혁 프로그램은 이렇게 허망하게 끝났다. 김옥균은 그뒤 10년 동안 권토중래를 꿈꾸며 일본에서 망명의 쓰라림을 견딜 수밖에 없었다.<글서사봉기자·사진 고영권기자>

◎개화파 추진 「14개혁신정강」내용:하

 이어지는 혁신정강은 다음과 같다.

 제7조 규장각을 철폐한다=이 조항은 전근대적인 양반귀족문화제도인 규장각제도를 폐지하고 일반 민중중심의 신교육을 골간으로 근대문화를 육성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낸것이다. 개화파는 일반민중에 대한 신교육이 나라를 구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인식했다.

 제11조 4영을 1영으로 통합하고 장정을 뽑아 근위대를 설치한다 (육군대장은 왕세자를 추대한다)=국방보다는 왕의 호위임무를 맡고 있던 전근대적인 군의 성격과 부대에 따라 훈련방법과 편제가 다른 후진적인 군조직을 개혁하기 위한 조치였다. 당시 군대는 전·후·좌·후영으로 나뉘어 국방보다는 왕의 호위를 주요 임무로 삼고 있었다. 전·후영은 서양식 군사훈련을 받았고 좌·우영은 원세개에 의해 설치돼 청국식 군사훈련을 받았다.

 제8조 급히 순사를 모집해 절도를 방지한다. 제10조 귀양가거나 금고돼 있는 자들의 죄를 다시 결정해 방면한다=이 조항들은 ▲경찰제도의 근대화 ▲근대적 행형제도의 수립 ▲가혹한 중세적 행형제도에 의해 유배되거나 금고된 사람들의 석방을 통한 민심수습등을 노린 조치였다.

 제5조 가렴주구를 일삼은 자 가운데 그 죄가 무거운 자는 용서없이 단죄한다=수구파정권하에서 그 폐해가 극심했던 탐관오리들을 숙청하겠다고 밝힌것이다.

 이상의 혁신정강에 나타난 개화파의 사상은 근대적인 자주독립국가, 나아가 「힘 있는 현대적 국가의 건설」로 요약될 수 있다.

 김옥균은 개화파동지들을 양성하는 과정에서 『일본이 동방의 영국 노릇을 하려고 하니 우리는 아시아의 불란서가 되어야한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이들은 일본이 영국처럼 부강한 근대국가로 성장해 다른 나라를 침략하려 하고 있으니 우리도 불란서같은 「힘 있는 현대적 국가」가 되어 다가오는 일본의 침략과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막아내야 한다고 판단한것이다.

 개화파는 조국을 세계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겨루는 국가로 육성하려 했으며 적어도 외국의 침략을 자기 힘으로 물리치면서 발전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려는 야심적인 구상을 펴 보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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