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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제완화의 ABC/정운찬(한국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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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제완화의 ABC/정운찬(한국논단)

입력
1994.0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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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해 새아침을 맞이하여 정부와 언론은 일제히 포문을 열어 탈규제·국제화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선언하였다. 각종 규제를 풀고 나라문을 활짝 열기만 하면 금방 제2의 도약이라도 이룰 것 같이 말이다. 그러나 규제완화는 왜 하며 또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에 대한 차분한 논의는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규제완화는 왜 필요한가? 그것은 경제에 창조적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우선적으로 요청되기 때문이다. 모든 창조적 활동은 자유로운 상황에서나 가능하다. 밀(J·S·MILL)도 지적하였듯이 확실하고 영속적인 개혁의 원천은 자유라고 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창조적 경제환경의 조성을 위해 규제의 완화가 논의되는 것은 당연하다. 한편 한국경제는 구조조정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데 구조조정을 위해서는 새로이 회사를 만들기도 해야하고 없애기도 해야하며 때로는 인원을 늘리거나 감축하기도 해야한다. 이때 많은 규제는 구조조정의 커다란 걸림돌이므로 구조조정을 쉽게 하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경제에 신축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도 규제완화는 필요하다.

 그런데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일부 재벌총수들과 극단적 시장신봉자들은 모든 규제를 완전히 철폐하라고 아우성이다. 마치 규제가 모든 경제문제의 원인이었던 것처럼 목청을 높이고 있다. 그러나 규제의 완화는 필요하지만 한국경제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점을 규제완화로 풀려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발상이다.

 나는 오히려 최근 논의되는 탈규제의 제반 조치들이 위의 목적과는 상관없이 재벌의 이익만을 반영하도록 전개되지 않을까 우려한다. 산업구조조정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없이 자유방임적 정책을 시행한다면 그렇지 않아도 비대한 재벌에 경제력의 집중을 심화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정권과 유착된 재벌이 보여준 문어발식 확장과 불공정거래행위, 비생산적 투기등의 행태는 모방은 있으되 창의성이 실종된 경제구조를 낳았으며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의 불균형을 심화시켜 왔다. 이 과정에서 재벌의 중소기업 지배체제가 완성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예를 들면 재벌들은 중소기업들이 독자적 기술개발이나 연구에 주력하도록 지원하기 보다는 불안정한 하청관계를 이용하여 중소기업들간의 제살깎아먹기식의 경쟁을 부추겼고 결국 그들을 아사상태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튼튼한 중소기업없이는 건실한 경제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 특히 개방이 가속화되면서 갖가지 수입품이 우리의 시장을 공략해 올텐데 이 경우 중소기업에 유리한 다품종 소량생산의 체제가 뒷받침되어야 국제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따라서 중소기업의 발전은 시급하다. 재벌과 중소기업간의 불균형 문제는 그동안 정부의 대기업 우선주의 정책에서 크게 기인하므로 결자해지의 차원에서 정부가 산업구조조정정책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

 규제완화와 관련된 문제는 금융부문에도 산적해 있다. 한국의 금융기관은 너무도 허약하다. 이는 과거 정부정책의 산물인 부실여신에서 기인한다. 그런데 부실여신의 문제 역시 규제를 푼다고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 문제는 이미 금융부문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하기에는 너무 규모가 커지고 말았다. 93년 6월말 현재 시중의 14개 은행여신중 21·6%가 비정상 여신(추정손실+회수의문+고정+요주의)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은행의 금융중개기능이 제대로 발휘될리 만무하다. 부실기업과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는 은행은 기업이 도산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다시 대출을 해주고 이것이 부실채권을 더욱 증가시키는 악순환이 계속되어 왔다. 따라서 부실여신의 족쇄를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야 규제완화가 금융산업의 경쟁력 제고에 일조할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규제의 완화가 필요하다는 데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집 한채를 짓기 위해 도장을 수십번 또는 그 이상이나 찍어야 하는 국가가 어떻게 능률적으로 움직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규제의 완화가 결코 자유방임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불필요한 서류들은 없애야 하나 건축기준까지 없앨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과거에 성행했던 미주알고주알식의 간섭은 배제하더라도 독일·일본식의 산업정책은 유지하여야 한다. 그동안 사회주의의 유형에 가까운 통제에서 갑자기 민간에게 전부 맡겨버리는 영미형의 유형으로 전환한다면 중복투자(지난 몇년간의 석유화학투자와 앞으로 예상되는 자동차산업투자)가 발생하는등 비효율성이 초래될 가능성이 높다.

 최근 정부는 규제완화문제를 관장할 새로운 기구를 창설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규제완화문제를 일사천리식으로 해결할 기세다. 그러나 번갯불에 콩볶아 먹는 식의 성급한 탈규제는 전시효과는 있을지언정 우리경제에 득보다는 실을 초래할 것이다. 정부는 비록 어렵고 시간이 드는 일이지만 산업구조의 조정을 위한 구체적인 청사진을 먼저 제시하여야 한다. 그리고 규제의 완화는 그 큰 틀속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동태적 효율성에 입각하여 비교우위를 신중히 고려하고 적절한 산업정책을 세우는 것이 과거 어느 때 보다도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자면 경제에 대한 현황파악(FACT FINDING)부터 해야한다. 공연히 시끄럽게 탈규제·국제화를 떠들 것이 아니라 냉정히 한국경제의 재고조사부터 하자는 말이다.<서울대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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