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화·개방화라는 말이 봇물터지듯 쏟아지고 있다. 가히 국제화·개방화의 시대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하는 곳이 있다. 바로 정치권이다. 국가의사결정의 상층구조를 이루며 사회 각 분야를 선도해야할 정치권―. 바로 이 정치권이 국민적 과제로 부상한 국제화·개방화에 대해 소극적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권은 지난해 연말까지만 해도 이 문제를 가지고 법석을 떨었다. 물론 이 때도 정치권이 국제화·개방화가 피할 수 없는 세계적 흐름이라는 대세를 읽고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쌀시장개방이라는 발등의 불이 떨어지자 조건반사적으로 취한 의례적인 행동이었다.
어찌되었든간에 각당은 서둘러 특별대책기구를 만드는등 대응책을 강구하려 했다. 국회에도 우루과이라운드(UR) 특위와 국제경쟁력강화 특위가 신속히 구성되었다. UR협상이 진행중인 제네바에 의원들이 날아가고 제1야당은 국회에서 철야농성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여당은 사안의 전문성을 감안해 정부측의 대책이 결정된 뒤에 이를 토대로 각론을 논의하자는 입장이다. 야당은 국제화·개방화 문제의 한 부분인 쌀문제만을 가지고 농민 및 사회단체와의 연대투쟁을 모색하고 있는 정도이다.
여당은 야당이 쌀문제를 지나치게 정치쟁점화한 나머지 정부의 개방전략에 차질을 줄까봐 지레 겁을 먹고 있다. 야당은 반대투쟁의 수위조절과 대안제시의 어려움을 절감하고 있는 모습이다.
국회의 UR특위는 어떠한가.
UR의정서가 최종 번역되기도 전에 회의를 열어 의정서 번역이 늦은 것은 정부의 태만이라고 호통을 쳤다. 그리고는 잠잠해져버렸다. UR특위는 그 뒤로 회의를 열지 않고 있다.
그래도 UR특위는 나은 편이다. UR특위와 함께 구성된 국제경쟁력강화 특위는 아직껏 상견례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연말 단행된 여권진용개편의 여진과 새해 정부의 느슨함이 겹쳐진 때문이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입만 열면 구두선처럼 국제화·개방화만이 살길이라고 외쳐대고 있다. 어떻게 해야 치열한 국제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방향제시는 전혀 없다.
구체성이 결여된 당위론의 반복이다. 구호정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정치권은 국제화·개방화를 구태의연한 구호정치 수준에서 접근하고 있는가, 아니면 항상 그래왔듯이 타성에 젖은 방관을 계속하고 있는 것인가.
새해들어 경제주체들 사이에서는 국제화·개방화의 파고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활발히 논의중에 있다. 농민들 스스로도 UR시대의 생존방법을 적극 모색중이다. 복잡하기 이를데 없는 UR협상의 여러 측면을 알기 위한 노력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정치권은 침묵 뿐이다. 여당은 전당대회를 단숨에 연기시켜버린 대통령의 위세에 가위눌려 눈치보기에 급급하고 있다. 야당은 열릴 것같지도 않는 1월 임시국회를 소집하자는 주장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정치권은 새해에도 개혁과 사정드라이브에 끌려 다녔던 지난해 못지않게 정치실종의 위기상황을 맞고 있다. 현실은 정치자체를 상당부분 소모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대통령은 연두기자회견에서 국가경쟁력강화를 역설하면서 가장 선진화되어야 할 부분으로 정치권을 꼽았다.
정치권이 자기혁신을 게을리하거나 자구노력을 하지않을 경우 정치실종이라는 아무도 바라지 않는 사태가 올 수밖에 없다. 정치실종사태는 올해의 국가목표인 국가경쟁력강화를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스럽지 않다. 아무리 유능한 행정부라도 잘못이 없을 수 없다. 권력의 속성은 절대로 견제와 균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국민적 중지를 모아야 할 국가경쟁력강화를 위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국가운영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정치권이 제 기능을 하지못할 경우 곧바로 국가적 손실에 직결된다.
정치권은 갈수록 어려워져 가고 있는 정치환경을 탓할 것만 아니라 주변에서부터 할 일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만 정치권은 자기존재를 스스로 입증할 수 있다.
국가적 명제가 된 국제화·개방화에 대해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도 그중 하나가 된다. 국제화·개방화에도 분명히 정치권만이 할 수 있는 고유 영역과 특수 역할이 있다. 다만 정치권은 이를 찾아내지 못하거나 아니면 이를 찾는데 게을리하고 있을 뿐이다.【편집국장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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