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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을 살리자/호문혁 서울대법대교수·법학박사(특별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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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을 살리자/호문혁 서울대법대교수·법학박사(특별기고)

입력
1994.0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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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의 기대를 듬뿍 받은 문민정부가 출범한 지 거의 한 해가 다 되어가는 이 시점에서 변화와 개혁의 시대적 흐름을 좇아 지난날을 반성하고 스스로 새 모습을 갖추고자 애쓰는 사법부의 노력이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사법제도발전위원회(약칭 사법위)를 발족시켜 사법부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심도있게 토의하여 개선안을 마련하고 있다. 재판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높이기 위하여 법관의 임용자격을 강화한다든지, 사법의 독립과 민주화를 위하여 법관회의와 법관인사위원회를 법으로 정하는 등의 획기적 개선안을 속속 발표하고 있어 많은 국민들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런데, 사법부개혁에 대한 논의를 접할 때마다 항상 답답함을 느끼게되는 부분들이 있다. 기본적으로 우리의 법률생활의 규모가 날로 팽창하고 있는데, 사법부는 아직 조직이나 예산의 규모에 있어서 영세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법부가 예산편성의 독립성을 가지지 않고는 진정한 사법의 독립이란 있을 수 없는데, 이 문제의 심각성을 부각시키는 논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보다 더 답답한 것은 대법원의 임무와 기능에 대하여 제대로 이해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원래 대법원은 나라의 사법정책을 결정하여집행하며, 무엇이 법인가를 선언하고 국민의 기본권은 어떻게 보호되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최고법원이다. 과거 군사정부 아래에서 대법원이 그와 같은 소임을 다했는지 의구심을 갖는 것도 일면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과연 대법원에 그러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었는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 국민은 어려서부터 삼세번을 좋아하다 보니 국민학생들도 가위바위보를 삼세번 해야 직성이 풀린다. 어떤 근거에서인지는 몰라도 재판도 삼세번 받는법이라는 인식을 갖고들 있다. 중병에 걸린 사람의 마지막 소원이 유명한 대학병원에 입원하여 진찰을 받아 보는 것처럼, 소송을 하는 사람은 대법원의 판결까지 받아보아야만 자기의 권리를 충분히 행사한 것이라는 생각이 뿌리 깊이 박혀 있다. 그러다 보니 대법원에의 상고를 제한하려는 것은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위헌적인 발상이라는 헌법상으로나 법률상으로나 아무런 근거없는 사고방식이 상식처럼 되어 버렸다.

 사실 우리나라의 소송은 외국에 비해서는 대단히 신속하게 이루어진다는 점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송이 오래 걸린다는 인식이 생긴 것은 바로 사실상 상소에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소송은 대법원까지 끌고 가야 한다는 인식 때문에 우리 대법원은 누가 보더라도 참으로 말이 아닌 처지에 놓여 있다. 작년 통계를 보면 대법관 한 사람이 처리해야 하는 본안사건이 연간 1천2백건정도가 된다. 살인적인 업무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이 많은 사건이 다 중요한 의미 있는 사건이라면 모르지만 그것이 아니다. 상고사건중에 8% 정도만이 상고가 이유 있어 하급심판결이 파기되는 것이 현실이다. 8%의 정당한 상고인들이 나머지 대다수 상고인들 때문에 그만큼 권리구제가 지연된다는 이야기이다.

 도대체 대법원이 무엇하는 곳인가? 우리 국민은 대법원을 은행 본점이나 시청의 민원창구 취급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 대법원이 별로 깊이 심리하지 않아도 이미 쓸데없이 한 상고라는 것을 아는 경우에도 일일이 장황한 이유를 붙여 판결을 해야 한다면 그러한 일속에 파묻혀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 국제정세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사회의 흐름조차도 폭넓게 살펴보지 못하는 일이 행여 생길까 걱정이다. 우리 대법원도 참으로 국민의 법률생활을 좌우할 중요한 사건들만을 철저하게 다루어서 미국이나 독일의 대법원처럼 정확하고 치밀한 이론을 전개하는, 학술논문 뺨치는 권위 있는 판결문을 써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관점에서 사법위가 상고제도를 개선해서 쓸데없는 상고를 걸러내는 장치를 마련하라고 대법원에 건의한다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구미의 모든 선진국에서 무익한 상고를 엄격히 제한하는 제도를 갖추고 있는 것을 보아도 그 필요성은 명백하다. 물론 상고를 제한하려면 당연히 사실심인 하급심, 특히 제1심이 대폭 강화되어서 국민의 가려운 데를 친절히 긁어줄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 이 점도 사법위에서는 충분히 고려하여 제1심을 대폭 강화하는 방안을 마련중이라고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고제한에 대하여 재야 법조계가 강력하게 반발한다는 소식이 들리고, 심지어는 사법제도를 개혁한다는 핑계를 내세워 대법원이 편하게 일하려 한다든가, 대법원의 권위에만 집착한 재판편의주의적인 발상이라고까지 비난한다고 한다.

 그러나 재야 법조계도 무엇이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길인가를 잘 생각해서 대법원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의식의 개혁없는 제도의 개혁은 모래 위의 누각에 불과할 것이므로 그러한 인식전환이야말로 바로 개혁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대법원을 대법원답게 만들자. 그 필요성이 너무도 절실하기 때문에 비록 한시적인 기구이지만 사법위의 활동에 거는 기대가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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