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획일·규격화에 형식적인 설치/외국관광객 길찾기 도움못줘/외국어 병기도 확대 국제화 발맞춰야 도로표지, 관광안내판, 상점간판등은 단순한 안내기능을 넘어 도시의 표정을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 선진 각국의 국제도시를 다니다보면 다양한 색채와 세련된 디자인의 간판·표지판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절로 다가가고 싶은 친밀감을 갖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시각적 효과나 미관은 그만두고 안내기능부터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만큼 도로표지와 간판·안내판이 획일화 규격화돼 있다. 우리의 안내판·간판은 한국이 아직도 국제화에 요원하며 오히려 쇄국주의상태임을 외국인들에게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도 획일화 규격화는 다양성을 요구하는 국제화의 걸림돌이라는 인식부터가 부족하다.
세계 6대도시(인구기준)로 꼽히는 서울은 외국인들에게 거대한 미로나 다름없다. 「94 한국방문의 해」에 서울에 오는 외국인들은 88올림픽이나 대전엑스포때 그랬듯이 교통표지·관광안내판을 보고는 길을 찾을 수 없으며 간판만 보고는 옷을 사야 할지 식사를 해야 할지 모르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상한 영어식으로 된 한글일색의 간판 앞에서 외국인들은 낯선 풍물과 만난 구경꾼일뿐 고객이 되고 싶어도 될 수가 없다.
외국인들은 동서와 남북방향으로 거리명이 분리돼 길찾기가 쉬운 외국처럼 서울의 동서를 「○○로」, 남북은 「▲▲길」식으로 구분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곤 한다. 좌표문화에 익숙한 외국인들은 아직까지 점의 문화에 머물러 있는 우리사회를 답답해 하고 있다.
외국인들은 안내·표지판에 쓰인 영문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고 불편을 호소하고 있다. 크기도 문제이지만 특수기호까지 등장해 어느 나라 말도 아닌 말이 돼버린 까닭이다. 글자사이에 들어간 어깨점( )과 반달표( )만 다를뿐 알파벳은 「CHONGJU」로 동일하게 표기된 청주와 정주를 구분하거나 「NAMSAN」(남산)이 산이름이며 「KAPSA」(갑사)가 절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외국인은 없다. 어깨점이 격음(격음)을 표시하고 반달표는 모음 「ㅓ」와「ㅡ」를 표시할 때 「O」「U」위에 사용한다는 원칙을 아는 한국인부터가 드물다. 국어로마자표기법을 개정하면서 안내대상자인 외국인들을 고려하지 않은 탓이다.
또 외국관광객의 절반이상이 한자문화권인 일본 대만 홍콩 싱가포르사람들인데도 한자가 병기된 도로표지는 전무한 상태다. 관광안내판에는 한자표기가 있으나 안내판 자체가 눈에 잘 안 뛰는 곳에 형식적으로 설치되어 있다. 그나마 표기가 엉망이다. 동대문운동장앞 관광안내도의「동대문」이 「동대문」으로 고쳐진 것은 불과 얼마전의 일이며 한국방문의 해를 맞아 전국의 관광안내·도로표지를 한글 영어 한자로 병기한다던 계획도 계획 자체에 그쳤다.
우리말 사용이 절실한 일상용어에선 외국어가 범람하는데 정작 영어 한자가 필요한 간판·도로표지는 한글일색이다. 문자쇄국주의를 드러내주고 있는 이들 간판과 표지판은 이 시대의 척화비나 다름없다. 한글간판만 허가해 주는 행정의 획일적인 우리글애착은 「미네르바」 「피자헛」등 오히려 영어를 한글로 쓰도록 하는 한글학대로 나타나고 있다.
관리기관이 분산된 현재로선 도로표지의 체계적 관리,개선을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이다. 고속도로는 한국도로공사, 국도는 건설부, 직할 시도는 관할시장, 지방도는 도지사등으로 세분된 관리체제에서는 개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한국관광공사 권호기행사1부장(48)은 『도로표지, 간판문제등은 88올림픽과 대전엑스포때도 지적됐으나 개선되지 않았었다』며 『장관이나 시장이 마음만 먹으면 금세 바꿀 수 있다는 식의 발상은 이젠 통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공직자들이 먼저 창의력을 발휘, 민간과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국제도시의 면모를 갖출 개선방안을 마련해내야 한다는 주장이다.【이태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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