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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과 홍순목·영식 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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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과 홍순목·영식 부자

입력
1994.0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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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사실패후 일 망명거부…청에 피살/홍영식/수구파 거두… 관직·아들 잃자 자살/홍순목 홍순목(1816∼1884) 영식(1855∼1884) 부자는 갑신정변을 전후로 해서 각각 영의정과 좌의정이라는 당대 최고의 관직에 올랐으나 또한 누구보다도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수구파였던 부친이 이끄는 정부를 전복한, 그래서 아버지 홍순목에 대한 개화파 아들의 반역이기도 했던 갑신정변은 이들을 모두 제물로 삼았다.

 세계관이 달랐으므로 화합할 수 없었던 이들 부자의 비참한 최후는 갑신정변의 실패로부터 왔다.

 <…홍영식은 본디 인후하고 평상시 교제도 매우 원만했다. 그리고 변이 일어난 뒤에도 병정을 보내 민영익을 보호했고 또 원세개와도 교분이 두터웠다. 그는 어쩌면 청국의 손아귀에 넘어가도 안전할 수 있으므로 일본 망명계획에 대해 이야기만 해주었을 뿐 스스로 결정하도록 했다. 홍영식은 『대가(임금이 타는 가마)를 따라가야 합니다』라며 망명을 거부했다…>

 홍영식이 갑신정변 실패 직후 동료들과 일본으로 망명하지 않고 청군진영으로 향하는 고종의 가마를 따라 국내에 남게 된 상황을 김옥균은 갑신일록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러나 홍영식은 김옥균의 희망과 달리 고종을 모시고 청국 진영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청군의 칼에 목이 떨어지고 말았다. 1873년 관직에 발을 들여놓은지 11년만이었고 그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1844년(헌종1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관직생활을 시작한 아버지 홍순목은 두 번의 커다란 정치적 부침을 경험하지만 끝내 흥선대원군과 운명을 같이 한 그의 심복이었다. 

 따라서 홍순목은 젊은 개화파의 사상적인 적이자 아들 영식이 극복해야 할 대상이기도 했다.

 이조판서, 한성판윤, 예조판서를 거쳐 1869년(고종6년) 우의정에 오른 그는 당시 수구강경파의 거두로서 대원군의 쇄국주의를 적극 지지했다. 1871년 중국주재 미국공사 로우와 로저스제독이 미국군함 콜로라드호를 타고 강화도 광성진에 들어와 통상교섭을 요청하자 강경하게 척화를 주장하며 전쟁을 선포한 장본인이었다.

 1872년 영의정에 오른 그는 이듬해 대원군이 실각하자 사임하고 한직인 중추원부사를 지내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재집권함에 따라 다시 영의정에 복직해 대원군의 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그러나 다시 대원군이 실각하자 1884년 사직, 재차 중추원부사로 있던 중 아들 영식이 개화파의 주요 간부로 갑신정변을 주도하다 살해되자 관직이 삭탈됐고 곧 이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젊은 아들의 죽음에 이은 허망하기 짝이 없는 아버지의 최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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