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통합… 세계 8위 대국 부상/95년 정상회담→교류 가속화/97년 북 개혁세력 집권→군축→99년 경제통합 돌입 앞으로 1년이면 「분단 반세기」로 접어든다. 민족의 의사와 관계없이 남북이 갈라진 직후부터 통일을 위한 노력은 부단히 계속돼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49년간의 철저한 상호 차단정책, 그리고 냉전구도하의 상호 적대관계는 남북의 갈등을 더 증폭시키고 이질성의 골을 더 깊게해왔을 뿐이다. 민족의 노력과는 반대로 통일은 더 멀어지는 「반비례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90년대들어 구호로서의 통일,당위성으로서의 통일은 갑자기 빠른 속도로 현실로서의 통일로 가시권에 다가오고 있다. 분단이후 처음으로 우리 스스로의 노력이 통일의 시기와 형태를 결정할 수 있는 「정비례의 시대」로 접어든 느낌이다.
비로소 통일의 시나리오가 「허황」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의미있는 시기가 된것이다. 가상으로서의 통일시나리오는 대화와 타협에 의한것에서부터 무력제압의 수단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든 원치않든 시나리오의 포커스는 두가지에 맞춰질 수 밖에 없다. 북한의 갑작스러운 체제붕괴와 이로인한 혼란 그리고 정돈, 즉 비관적 시나리오와 기능적 접근에 의한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통일, 즉 낙관적인 시나리오 두 갈래이다.
「정비례의 시대」의 문턱이랄 수 있는 94년, 신년초부터 남북은 새로운 대화전개를 위해 또다시 실험에 나설것으로 전망된다. 한반도 주변정세는 그렇게 움직여 가고 있다. 이러한 때 학계 및 전문가의 조언을 토대로 우리가 맞을 통일의 시나리오를 정리해보는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 될것이다.
시나리오는 94년중 핵문제타결 합의후 2010년 통일조약이 체결되기까지 20년 가까이 이어진다.
94년초께 미국과 북한은 3단계 고위급회담을 열고 핵문제 타결에 합의,북한은 NPT에 복귀를 약속한다. 미북회담 직전부터 시작된 몇차례의 실무대표접촉에서 송영대차관과 박영수조평통서기국 부국장은 94년 상반기중 특사교환에 합의한다. 우리측의 이영덕부총리 또는 한승주외무장관과 북한 김영주부주석은 평양과 서울을 각각 2박3일씩 차례로 방문, 김일성과 김영삼대통령을 만난다.
두 특사는 서울과 평양에서 북한핵문제의 타결이 목전에 있음을 선언하고 정상회담성사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때맞춰 IAEA는 북한의 7개 신고핵시설 및 영변 미신고핵시설에대한 사찰을 마치고 북한은 NPT복귀를 선언한다.
94년 말께부터 기업인들의 방북이 허용돼 나진·선봉지역에 대한 기업대표의 방문러시가 이루어진다. 그러나 곧 과당경쟁을 막기위해 경제협력단등의 이름으로 공동합작투자가 모색된다.
○합작투자 등 모색
그러나 남북관계가 매끄럽지만은 않다. 우리측이 요구하는 고위급회담 각분과위 개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북한이 우리측을 소외시킨채 대미·대일관계개선을 추진하는 노선을 계속하기 때문이다.
김영삼정부는 핵―경협 연계정책과 국제공조체제에서 크게 탈피,대북투자를 권장하고 다자간 동북아 안보협력체와 경제공동체에 북한참여를 관련국들에 요구하는 획기적인 대북 유화책을 발표한다.
94년 하반기 서울에서 다시 개최된 특사회담은 동북아지역 안보·경제협의체에 남북한 공동보조를 선언하고 이산가족방문단이 서울과 평양을 교환방문한다.
95년 상반기 김영삼대통령은 평양 주석궁으로 북한 김일성을 방문,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지고 김정일과도 면담한다. 양측은 기본합의서이행, 남북투자 통상관련 협정을 체결하고 평화체제전환을 위한 원칙적 합의를 선언한다.
같은 시기 북한에서는 제7차전당대회가 소집돼 김정일은 당총비서에 추대되고 제한적 경제개방정책을 선언한다. 김일성은 95년부터 건강이 악화되고 전국을 누비던 현장지도는 중단된다.
북한에서의 권력승계작업이 마무리되는 가운데 나진·선봉지역, 남포등에 남북합작기계 전용공단이 건설된다. 국내기업들은 양말제조기계 또는 경소비재 생산플랜트를 수출한뒤 완제품을 받아 유럽지역에 수출, 기계판매대금으로 충당하는 이른바 되사기(BUY BACK)무역을 전개한다. 대북 투자규모는 96년까지 10억달러, 교역규모 95년까지 10억달러에 이르는등 화해교류시대가 본격화된다.
○평화체제로 전환
95년 하반기 두번째 정상회담은 96 아틀랜타올림픽 단일팀, 언어통일위원회,학술교류등 민족동일화 작업추진을 위한 원칙에 합의한다. 회담직후 김일성주석이 사망하고 김정일이 국가주석에 취임한다.
김정일이 정국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함에따라 혼란기에 접어들면서 남북대화는 일시적인 공백기에 접어든다. 유일체제고수 또는 실각사이의 선택을 강요받은 김정일은 주체적 개혁이라는이름으로 체제개혁에 착수, 개혁세력 흡수를 모색한다.
경제분야에서는 중국의 경제개혁정책을 모방, 부분적으로 시장기구를 도입하여 경쟁가격과 계획가격이 공존하는것을 허용하고 노동시장에도 계약제를 도입한다. 그러나 결국 김정일은 97년께 군사쿠데타 또는 당내 개혁인사에 의해 실각된다. 소장파 군장성이 이끌며 새로 등장한 정권은 경제부흥을 기치로 테크너크랫과 연합, 1년내에 정국을 수습한다.
97년 김영삼대통령은 서울에서 북한의 새 주석과 세번째 정상회담을 갖는다. 남북한은 시베리아 가스전개발에 공동참여, 가스관이 북한을 통해 남한으로 연결된다. 남북한은 정상회담과 각료회의,국회대표회의를 정례화하기로 합의하고 군축의 원칙에 합의한다. 97년말 1단계 군축으로 지대지 미사일, 전차등이 폐기된다. 폐기비용은 소련제탱크 1대당 3만6천달러꼴로 우리측이 부담한다.
98년 남한의 새 대통령과 북한의 주석은 매년 정례화된 정상회담에서 남북평의회 남북공동사무국설치를 합의한다. 남북평의회는 대의기구로서 남측의 국회의원과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중에서 동수를 뽑아 구성되고 만장일치제를 채택한다.
99년 경제통합을 시도키 위한 논의가 시작된다. 이듬해 화폐단위 통일과 남북 산업구조 조정협의회가 구성돼 수직적 분업을 위한 논의를 벌인다.
2000년대들어 북한은 개혁초기의 실업사태등 부작용이 끝나고 고도성장이 시작된다. 남북한 올림픽위원회가 통합되면서 세계대회규모의 국제경기에는 전종목에 단일팀으로 출전하게된다.
2005년 정상회담에서는 수년간 고위급회담에서 논의돼온 정당활동의 자유화가 발표돼 남쪽에서 조선노동당의 활동이 합법화되고 북한에서는 남한의 정당들이 활동하게된다.
통일의 해 2010년, 분단의 해에 태어난 세대는 65세, 전쟁세대는 60세이상이 되면서 서로 적대감을 가진 세대는 극소수로 줄어들고 반면 화해교류의 시대에 태어난 세대는 10대후반에 접어들었다. 남북한 총병력은 인구의 0.5%인 40만명, 군사비는 국민총생산의 1%미만인 40억달러수준으로 감축됐다(현재는 군사비가 남한 GNP 3.8%,북한 GNP 22.4%).
○극동 최대경제권
서울에서 남북한 정상은 대통령중심 2원집정제, 양원제, 다당제를 골자로하는 통일조약을 체결한다. 남북평의회에서 합의하고 각각의 의회가 승인한 통일헌법은 즉시 발효되고 총선거가 실시돼 상하원을 구성한뒤 대통령을 간접선거한다.
통일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은 9천9백80억달러로 세계8위, 1인당 GDP가 1만2천7백71달러(남한지역 1만6천3백43달러)로 G10(세계10대경제대국권)내에 정착한다.
남북한의 인구는 2010년에 7천9백만명으로 세계11위이나 흑룡강성, 요령성, 길림성등 중국의 동북부 3성을 포함해 일본인구에 버금가는 1억3천만명규모의 한국경제권(또는 발해경제권)이 형성된다. 나진·선봉지역은 태평양과 유라시아대륙을 잇는 교통·교역의 중심지(landbridge)가,남한의 각공단은 동북아경제권의 핵심 첨단산업지대가, 서울은 세계적 문화의 중심지가 된다.
◇낙관적 통일시간표
▲94년 초반:미·북 3단계 고위급회담 북한, 핵사찰 수용 NP T복귀 약속
상반:남북한 특사교환, 정상회담 가능성 시사
하반:IAEA, 북한 핵사찰. 북한 NPT 복귀 남한, 기업인 방북 허용 획기적 대북유화책발표 남북한,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교환
▲95년 상반:평양서 남북 정상회담 개최, 평화체제전환 합의선언 북한, 당 7차대회 김정일 총비서 추대 남한, 대 북한 투자 본격화
하반:제2차 남북정상회담, 96올림픽 남북단일팀 구성등 학술, 사회, 문화 교류 러시 김일성 사망, 김정 일 국가주석 취임
▲96년:북한 내부 혼란. 김정일, 체제개혁시도 부분적 시장경제 도입
▲97년 초반:북한, 소장파장교그룹 군사쿠데타 김정일 실각. 개 혁정권 등장
하반:김대통령, 북한 새주석과 제3차 정상회담 남북경협 본격화·군축합의
▲98년:제4차정상회담 남북평의회 남북공동사무국설치 합의
▲99년:남북 경제통합논의 시작
▲2000년:북한 경제 고도성장
▲2005년:남북한 정당활동 자유화
▲2010년:남북한 통일조약 체결, 통일헌법제정 남북한 총선거, 남북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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