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시 즐겨… 소재는 「가족사」/“경 그대로 전달… 해석은 독자에게” 94년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인 조연호씨(24)의 시 「열매를 꿈꾸며」와 「길을 향하여」는 사물의 이미지를 섬세한 상상력으로 포착해내어 일상의 삶과 정교하게 엮고 있는 작품들이다.
심사위원들은 그의 시가 사물에 대한 몽상과 묘사를 적절히 배합하고 주관과 객관을 교묘하게 병치시키는 점에서 뛰어나다고 평가하고 있다.
「열매를 꿈꾸며」는 개화의 이미지가 그 과정을 응시하는 시인의 외롭고 고통스러운 꿈과 겹쳐지며 「길을 향하여」에서는 비 내리는 길가의 어지러운 풍경이 세상살이에 지친 시인의 모습과 중복된다.
<비가 온다. (…) 천둥이 얹힐 때마다 물먹은 지붕은 자꾸 무거워졌다. 들풀들은 몸을 엎디어 바람의 길을 가르쳐 주고 나는 농아모녀가 손가락으로 둥글게 말을 엮는 것을 보았다. (…) 여러 개의 물길만큼이나 어지럽게 사람들의 걸음은 흙탕물을 섞으며 걸어간다> (「길을 향하여」중에서) 비가 온다. (…) 천둥이 얹힐 때마다 물먹은 지붕은 자꾸 무거워졌다. 들풀들은 몸을 엎디어 바람의 길을 가르쳐 주고 나는 농아모녀가 손가락으로 둥글게 말을 엮는 것을 보았다. (…) 여러 개의 물길만큼이나 어지럽게 사람들의 걸음은 흙탕물을 섞으며 걸어간다>
비―천둥―물먹은 지붕―농아모녀―사람들의 걸음걸이. 언뜻 쉽게 연결될 수 없는 이미지이지만 그는 이것들을 아름답게 엮어 인생의 아픔과 쓸쓸함을 그리고 있다.
『현상학적이라고나 할까요. 눈에 보이는 풍경을 그대로 전달하면서 독자가 그 속에서 다른 무엇을 해석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서울 생활을 하다 지금은 충남 조치원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님 밑에서 큰 어려움 없이 컸다. 국민학교 때부터 글에 재능을 인정받아 「작은 시인」이었던 그는 서울예전 문예창작학과를 지원할 때도 갈등이 없었다. 평생토록 시를 쓰기 위해 넘어야할 통과의례라고 생각했던 신춘문예도 비교적 쉽게 넘겼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시에 대한 열정과 몰입은 남다르다. 그는 아직 앳되고 상기된 표정으로 『「본능적」이라고 말할 정도로 시에 끌린다. 다른 장르를 넘겨다본 적이 없다. 평생토록 시를 쓰겠다』고 말했다.
이야기가 있는 산문시를 주로 써온 그가 관심을 갖고 있는 소재는 가족사이다. 자신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삶의 무늬진 이야기들을 운율이 있는 언어로 표현하고자 한다.
『한 때는 시 내용을 사회에 떼밀려고도 했지만 지금은 「개인이 깊어져야 사회도 깊어진다」는 생각으로 내면의 울림이 큰 시를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지난 봄에 졸업한 뒤 한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다.【이현주기자】
◎당선소감/“˝온몸이 해토되는 따스한 아침의 감격”
며칠동안 나는 창틀에 얹어놓은 작은 화분에 담긴 선인장 곁에서 그의 느린 죽음을 살펴보았다. 볕은 아무리 불러도 엉킨 타래실처럼 창밖 저편에만 뭉쳐 있었다.
창밖엔 눈발이 내리고 있었고 나는 하수구에서 올라오는 질경이풀 같은 물소리를 들었다. 나는 그 소리가 내 예민함이라는것을 깨달았다. 나는 몹시 힘들고 부대끼는 잠을 코 밑까지 덮고 오래도록 깨어나지 않았다.
친구들은 사람들의 평온을 거쳐 흐르면서 물은 점점 더워지리라는 내 꿈을 위해 아무도 전화해 주지 않았다.
나는 시궁쥐처럼, 내 예민함처럼 저녁이 들기 시작하는 창가로 나를 조금씩 옮기기 시작했다.
당선이라는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바슐라르의 느릿느릿하고 평화로운 책 속에 담겨 있었다. 나를 적요한 곳으로 거둬들이기 위해 「처방」으로 읽던 그 책에서 나는 내 몸이 해토되는 따스한 아침 한 때를 만난것이었다.
조치원, 오규원 선생님, 인상주의, 핑크 플로이드, 내 고통 속에 계신 부모님, 대흥형, 미영. 내게 소중한 이 고유명사들에게 감사하고 심사를 해 주신 선생님들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조연호】◎심사평/환상과 삶의 언어 긴밀히 엮어내/「상투적 자족양식」탈피 새로움 돋보여
아마도 신춘문예는 자족적 양식 속에서 편안한 시들을 선택해 왔던것같다. 시가 시의 밖에 있을 어떤 가치를 지향하기 위한 방편적 언어일 경우에도 그 방편으로서 자족을 확보하는 것이 시의 아름다움이고 힘일 테지만, 우리나라 신춘문예의 오랜 세월은 자족을 반성하지 않는 자족적 상투형을 심화시켜온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을 우리는 응모자들에게 전한다.
우리들이 마지막까지 붙잡고 돌려읽은 작품들은 윤의섭(경기 시흥) 이기인(인천) 윤효(광주) 김경삼(부산) 최수우(서울) 이동재(경기고양) 최상(전북 이리) 심종철(서울) 조연호(서울) 김현일(광주) 윤민하(〃)의 원고였다. 우리는 그중에서 새롭게 성취한 영역이 없이, 굳어진 틀 속에서 자족을 과시하는 시들과 정련된 언어의 바탕이 없이 방편만이 돌출하는 시들, 그리고 아직 표현에 도달하지 못한 사념들로 가득찬 시들을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그렇게 해서 조연호(「열매를 꿈꾸며」외 7편) 윤민하(「석창리기행」외 4편) 김현일(「세수대야논」외 5편), 이 세사람의 원고들을 추렸다.
김현일의 시 속에서, 체험의 깊이와 그 체험을 언어화해야 한다는 절박한 진지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체험이 밀어올리는 언어가 체험의 시적 전환에까지 이르지 못하는 점은 안타까웠다. 윤민하의 시들은 농촌의 파탄, 노동과 삶의 소외, 생명을 멸절시키는 공해를 그 속에 처해 있는 인간의 내면으로 각인시키는 힘이 있었다. 그런데 그 힘은 다만 잘 정돈된 이야기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어서 시가 시로서 말하려는 사회문제를 돌파해 나오지 못하고 그 문제 속에 주저앉아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당선작으로 뽑은 조연호의 시는 환상과 언어를 긴밀히 엮어냄으로써, 환상에 삶으로서의 깊이와 무게를 얹어주고 있다. 살아서, 삶 속에서 유효하게 가동되는 환상의 모습은 아름답고, 그 아름다움은 더 이상 환상의 영역에만 머무는 아름다움이 아닐 것이다. 그가 이룩해낸 새로움이 더욱 새롭고 깊어지기 바란다.【신경림·김광규·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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