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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정국 결산/「문민개혁」 회오리에 정치권 “꽁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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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정국 결산/「문민개혁」 회오리에 정치권 “꽁꽁”

입력
1993.12.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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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드러난 거물들 대거철퇴/「토사구팽」한때 대유행… 표적수사 비난도 일어/야 지도력불재 한동안 난맥상/이대표 「신노선」목청… 쌀정국 호기로 입지만회/희비엇갈린 보궐선거… 구태국회 실망/「임기동반내각」 부조화등 노출로 단명 김영삼대통령의 집권 10개월이 지나 새해가 오고있다. 개혁과 경제회생이라는 두개의 목표를 내건 새정부는 과거의 군사정권과 차별화를 내세우며 과감한 조치들을 연이어 내놓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정치 경제 사회등 국정전반에 걸친「새로운 실험」이 시도된 93년이었다.

○재산공개

 헌정사상 유례없는 공직자재산공개는 금융실명제실시와 함께 새정부의 개혁원년을 대표한다고 볼수있다. 문민정부출범으로 부정부패의 고리를 끊겠다는 김대통령은 취임 이틀뒤인 2월27일 대선때의 약속대로 자신과 가족들의 재산을 공개,거센 회오리바람을 예고했다.

 법적인 의무는 없지만 김대통령의 선례에 따라 장차관,청와대비서진이 재산을 공개했고 박양실보사부장관등이 부동산투기혐의로 중도하차했다. 이어 민자당도 구여권세력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개혁첨병인 최형우사무총장의 진두지휘아래 재산공개를 했고 야당도 여론에 밀려「울며 겨자먹기」로 뒤따를수밖에 없었다.

 재산공개는 수십년간에 쌓인 부패구조와 왜곡돼온 분배구조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냈고 축소·누락공개는 물론 부동산투기 직위이용부정축재등 재산형성과정의 도덕성을 놓고 국민적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일부에서는 문화혁명당시의 중국에 비유하며 법과제도에 의한 공개를 주장하기도 했고 지탄을 받은 인사들은 억울함을 강변했지만 도덕성회복을 바라는 국민의 기대를 거역할수는 없었다. 이바람에 김대통령의 지기였던 김재순전국회의장이「토사구팽」이란 말을 남기고 정계를 은퇴한것을 비롯, 박준규국회의장 유학성 김문기의원이 뒤를 이었고 민자당에서는 정동호 림춘원의원이 당을 떠났다.

 『돈과 명예를 공유할수없다』는 김대통령의 의지는 5월임시국회에서 공직자윤리법을 개정, 1급이상 공직자들의 재산공개를 법적으로 제도화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도덕성을 한단계 높여놓았다. 또한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정계와 관계의 예에 따라 재벌 학교재단 언론등 엘리트집단에 대한 재산공개요구의 목소리가 제기됐었을만큼 사회전반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사정정국

 취임전부터 「깨끗한 정부」를 국정지표로 내건 김대통령의 집권초기 6개월은 그야말로 「개혁=사정」의 시기였다. 일부러 과거를 들추는 식은 지양하겠다고 했으나 수십년 군사정권아래서 굳어진 부패구조를 「성역없는 사정」으로 척결하는 과정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수있었다.

 사정정국의 정점인 슬롯머신사건으로 박철언의원 이건개대전고검장 엄삼탁병무청장 이인섭전경찰청장등 구정권의 핵심인사들이 구속됐다. 또 연이은 군인사비리로 이종구·이상훈전국방장관 김종호·김철우전해군참모총장 한주석·정용후전공군참모총장 조기엽전해병사령관등 군고위인사들이 줄줄이 쇠고랑을 찼다. 이밖에 현역의원으로 6공의 핵심인물인 김종인의원이 구속됐는가하면 한때 민자당내 민정계의 대부였던 박태준전포철회장과 김종휘전외교안보수석등이 수배돼 아직도 외국에서 유랑생활을 계속하고있다.

 공교롭게도 과거 김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껄끄러웠던 인사들,주로 TK출신인사들이 사정의 그물에 걸려듦으로써 「표적수사」 「각본수사」등의 비난도 제기됐다. 또 지나치게 도덕성을 강조한 나머지 경제가 위축되고 공무원이 무사안일의 보신주의에 빠졌다는 지적도 뒤따랐다.

 그러나 초기의 얼어붙은 사정정국은 정기국회를 기점으로 「민생사정」으로 방향전환되면서 다소 풀어졌으나 새정부의 엄격한 사정의지는 국민에게 확고히 각인됐다.

○보궐선거

 올해는 유난히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많았다. 정권출범에 따른 중책기용과 재산공개등의 여파로 의원직을 사퇴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보궐선거는 4월23일, 6월11일, 8월12일 3차례에 걸쳐 모두 8개지역에서 실시됐다. 광명 부산동래갑 부산사하등 3곳에서 실시된 첫번째 보궐선거에선 정권초의 개혁바람을 타고 민자당이 전승을 거두는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두번째인 6·11보선은 민자당에 뼈아픈 시련을 안겨주었다. 철원·화천과 예천에선 승리 했지만 총력을 기울였던 명주·양양에서 패배함으로써 개혁의 전체적 이미지마저 상처를 입는 타격을 받았다. 특히 민주계중진인 김명윤고문이 낙선함에 따라 민주계의 당운영구도에 차질이 빚어지기도 했다. 반면 민주당은 명주·양양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국면전환의 계기를 잡았다. 8·12보궐선거에서도 민자당은 힘겨운 싸움을 했다. 대구동을에선 TK정서에 부딪쳐 고전끝에 패배했고 춘천에선 갖은 우여곡절을 겪다가 겨우 이겼다. 게다가 대구에선 금권선거 시비에 휘말리는 이중의 곤욕을 치렀다.

○민주당 전당대회

 민주당은 지난 3월 전당대회에서 9인집단지도체제의 지도부를 새로 구성했다. 새지도체제에는 그동안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해왔던 김대중대표의 정계은퇴로 발생한 공백을 메워 대선패배의 충격에서 헤어나지못하고있는 야당을 재건해야하는 무거운 과제가 주어져있었다.

 그러나 대표최고위원선거는 2차투표까지 가는 힘든 싸움끝에 「김심」을 등에업은 이기택후보가 김상현후보에 근소한 표차로 어렵게 승리해 이대표체제의 불안정한 앞날을 예고했다. 민주당의 9인집단지도체제는 김영삼문민정부의 개혁드라이브에 밀려 정국의 주도권을 상실한채 의사결정의 지연, 당직인선잡음등으로「9인9색」「9인주식회사」등의 표현이 말해주듯이 한동안 난맥상에서 헤어나지못했다.

 이대표는 정기국회직전 민생과 경제문제를 중시하는「신노선」을 표방, 자기 목소리를 점차 높이기 시작했으며 정기국회에서 안기부법개정, 여당의 예산안날치기처리 저지등의 성과와 쌀시장개방반대투쟁등을 통해 어느정도 리더십의 구심력을 형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자제단체장선거등에 효율적으로 대비하기위해서는 지도체제를 정비해 강력한 리더십을 형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조기전당대회주장이 나오고있는것도 사실이다.

○정기국회

 문민정부출범후 처음 열린 정기국회는 달라진 모습에 대한 기대로 관심을 모았으나 끝내 날치기와 실력저지라는 구태를 재연함으로써  큰 실망을 남겼다.그러나 초반의 국정감사는 폭로성질문이나 일방적 정부옹호등이 줄어든가운데 정책의 타당성을 묻는 질문들이 많아 국회의 생산성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정기국회는 후반부에 가서 안기부법개정등 민감한 정치관계법처리를 둘러싸고 야당의 예산연계전략과 여당의 법정시한내 예산처리방침이 맞부딪쳐 구태의연한 파행을 거듭했다. 특히 예결위는 여야간의 팽팽한 입장차이로 본래 기능을 상실한채 계수조정소위도 구성하지못할 정도로 표류했다.

 민자당은 날치기실패로 빗발치는 여론의 비난을 받으며 책임소재를 놓고 내부갈등까지 겪었다. 반면 민주당은 여당에 대한 비난여론을 활용, 안기부법개정협상등에서 안기부수사권을 축소하는등 망외의 성과를 거두고 그동안의 수세를 한꺼번에 만회했다. 이 와중에서 야당도 언제까지 다수결의 원리를 무시하고 과거와 같은 실력저지로 의사를 관철할것이냐는 비판적시각에 직면한것도 사실이다.

○당정개편

 김대통령이 취임후 10개월간 끌고온「1기내각」은 실험적 성격은 강했으나 실효성과 업무추진에서는 처음부터 말이 많았다. 때문에 김대통령으로서도『한번 임명한 장관은 나와 임기를 같이하겠다』는 공약에도 불구하고 지난 12월21일 전면개각을 단행, 당정의 면모를 일신할 수밖에 없었다.

 정부출범 한달도 못돼서 박희태법무장관 허재영건설장관 박양실보사장관과 김상철서울시장이 불미스런 일로 중도하차하면서 1기내각의 문제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북한핵문제를 둘러싼 외교안보팀의 부조화, 노사분규에 대한 내각의 팀웍부재, 몇몇 장관들의 돌출행동 그리고 눈에 띌 정도로 드러난 무능력장관등 한마디로 개혁에 맞지않는 무기력한 내각의 갖가지 모습이 속출했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김대통령은 요지부동이었다. 믿었던 최형우사무총장이 아들의 대학부정입학사건으로 사퇴한것말고는 당을 건드리지않았고 서해훼리호참사로 이계익교통장관을 교체한게 고작이었다. 김대통령은 내각의 문제점을 잘 알면서도 자신의 말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11월들어 불어닥친「쌀정국」은 상황을 일순간에 바꿔놓았다. 김대통령도『뭔가 잘못돼가는것아니냐』며 고개를 들기시작한 국민감정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이에따라 소신으로 상징되는 이회창총리에다 정재석경제부총리, 이영덕통일부통리등을 기용, 내각의 색깔을 크게 바꿨다. 특히 1기내각에서 보수계층의 의구심을 샀던 한완상통일부총리 이인제노동장관 김덕롱정무장관등 진보적 색채의 인사들을 퇴진시킴으로써 국정운영의 방향을 재조정했다.【신재민·이계성·정광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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