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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과 달력(1000자 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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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과 달력(1000자 춘추)

입력
1993.12.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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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잎새처럼 한 장만 달랑 남아 있는 묵은 달력을 떼어내고 잉크도 채 마르지 않은 갑술년 새해 달력을 얻어다가 똑같은 못걸이에 걸어놓고 잠시 엉뚱한 생각에 잠겨본다. 20여년전 내 화실의 입구 벽면에 눈 몫이 가장 좋은 곳을 골라내어 콘크리트 대못으로 요지부동의 위치를 낙정하고 그후 해마다 형형색색의 달력을 얻어다가 일년씩 어김없이 매달아 두곤 했다. 그럭저럭 20여 성상이 흐르면서 세상에 회자되는 유신정권도, 5공비리도, 6공의혹도 달력의 숫자에 묻혀 이곳에 매달려 있었고, 꿈에 부푼 문민정부의 환희도, 사정의 한파도, 쌀개방에 무너져 내리는 국민의 함성도, 그러고 보면 모두 이 무심한 못걸이에 매달려 있었던 셈이다.

 이 요지부동의 한 점 공간과 까만 아라비아 숫자 속에 수없이 변화하는 시간의 흐름을 타고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역사는 기록되고 있으며 이 둘의 조화 속에 나의 삶이 영위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시간과 공간을 하나의 생각 속에 두고 시공을 뛰어넘어 보려는 깊은 뜻의 예술작업이 한국화, 곧 한국회화의 자생적인 미감을 형성한다.

 이제 며칠 후면 1994년, 여명의 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새해는 서울 정도 6백년의 기념비적인 해이다. 마치 6백년전에 조상들이 살고 있던 방 벽에 풍수지리까지 보아가며 눈 몫 좋은 곳을 가려잡고 말뚝을 잡아 도읍을 정한 후, 같은 말뚝에 5백99번의 달력을 걸었다가 뜯어내고 드디어 6백번째의 달력을 걸어놓으려는 것과 다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더 늦기 전에 이제는 문화적 줏대를 갖는 서울이 돼야 하겠다. 그래서 새해를「국악의 해」로 삼아 우리의 문화혼을 일깨워 보려는 의도는 눈물겹도록 고마운 일이다. 날로 변모하는 국적없는 서울의 얼굴 속에서 민족의 가락인 국악소리가 낯선 금속성 빌딩의 유리벽에 부딪쳐 공허로이 흩날림으로써 한낱 행사를 즐기는 분들의 여흥으로 끝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이를 계기로 문화 6백년의 긍지를 심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며, 이런 문화적 자생력만이 우루과이 라운드 개방시대를 맞아 경제적 자생력도 함께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나는 이러한 세상사 삶 속에서 그림을 배운다.<이종상·화가·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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