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비용·저능률체질 개혁 시급하다 WTO(세계무역기구)시대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가급적 대폭적으로, 그리고 신속히 자유경쟁질서의 확립이 추진돼야 한다. 자유경쟁질서란 단순한 자유방임을 의미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자유경쟁질서란 제도의 공백에서는 자리잡을 수 없다. 그것은, 그것을 수호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규칙(RULE)을 필요로 한다. 과거의 통제질서도 하나의 「제도」였듯이 자유경쟁질서도 엄정한 규칙에 입각한 하나의 「제도」이다. 그 규칙의 성문부분은 정부가 만들어내고 정부가 지켜야 한다.
종래와 같은 경제계획이 필요없게 되고 그때 그때의 미조정도 불가능하게 된다면 기획당국(이를테면 경제기획원)의 역할도 크게 전환될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경제기획원이 거시계획을 작성하고 그 목표달성을 위해 경제정책을 종합조정하였지만 이제부터는 거시계획의 목표달성이 아니라 자유화·경쟁화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제도설정의 방향을 종합, 조정하여야 할것이다. 우리 경제에는 불합리하게 민간경제활동을 규제·금지·처벌·감시하는 여러가지 제도가 그대로 남아있다. 오늘날 우리 경제의 고비용·저효율의 대부분이 이런 제도의 유산이다.
과연 정부 부처가 스스로의 권익을 축소하는 그런 자유화계획을 만족스럽게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 얼른 긍정적인 대답이 나오기는 어렵겠지만 한국경제의 고비용·저능률의 취약한 공급체계는 정부 스스로가 달라지지 않고는 개선될 수 없을 것이다. 2차대전이후 독일의 경제발전의 이론적 바탕을 마련한 룁케의 표현을 빌리면 「지배국가」가 「협동국가」로 탈바꿈하지 않고는 자유경쟁을 바탕으로 하는 경제발전은 어렵다. 룁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러한 적법적 분권적 협동적 국가를 만들어내고 그런 국가를 유지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과제이다. 정상적인 상태하에서도, 이를 위하여는 깊은 통찰, 확실한 직관, 가장 예민한 책임감, 그리고 끈질긴 인내심이 필요하다』 독일지도층의 이러한 통찰·직관·책임감 및 인내심이 독일의 번영을 가져왔다. 이런 지도력이 없이는 자유경쟁제도를 창출할 수 없다.
WTO시대에서 한국이 국제경쟁력을 기르기 위하여는 거시정책의 방향을 확실히 선택하여야 할 것이다. 고비용·저능률의 체질을 개선하기 위한 가장 바람직한 거시정책방향은 「스톱-고」(STOP―GO)의 반복을 지양하고 안정기조를 일관성있게 추진하는 일이다. 성장정책을 쓰다가 물가가 오르고 거품이 생기면 긴축으로 선회하고, 긴축이 성장률을 떨어뜨리면 다시 성장정책을 쓰는 등의 「스톱-고」정책으로는 도저히 경쟁력이 생길 수 없다. 지금과 같은 한국의 경제체질로는 강도높은 긴축정책은 쓰기 어렵지만 자유경쟁질서확립을 위한 개혁을 추진하면서 안정화 의지를 확실히 담은 정책을 몇해동안만 일관성있게 추진하면 반드시 바람직한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오직 이것만이 국민의 신뢰와 호응을 얻을 수 있는 길이다. 국민 대다수가 무엇보다도 물가안정을 바라고 있다. 「거시적 안정화 미시적 자유화」, 이것이 현단계에서 가장 옳은 정책배합(POLICY MIX)이 될것이다.
이 정책에도 많은 어려움이 뒤따른다. 그 효과가 당장 나타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성과가 당장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성급한 여론과 이익집단의 공격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에 관한 비전과 신념이 없이는 이 정책을 일관성있게 추진하기가 어렵고, 중도에 스톱―고로 회귀할 위험도 크다. 많은 사람이 안일한 성장을 바란다. 「코스트없는 자본주의(CAPITALISM WITHOUT COST)」를 원한다. 그러나 그런 자본주의는 끝내 성공한 적이 없다.
지금 한국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금융에 관한 개혁이다.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은 앞으로 한국의 금융개방을 줄기차게 요구할 것이다. 이에대해 준비가 없으면 어느날 또 쌀시장개방때와 다름없는 우왕좌왕하는 일이 재연될 것이다. 그 준비는 어떤 내용인가. 가장 필수적인 준비는 금융의 「대내적 자유화」다. 가급적 빨리 제 3, 4단계의 대내적 자유화일정을 앞당겨야 한다. 정책금융을 축소·폐지하고 은행의 여수신금리를 비롯하여 모든 금리를 자유화하고 금융기관의 책임경영제도를 확립하며 모든 창구지도를 폐지함이 바람직하다. 이를 위하여 금융통제에 관한 많은 법규을 개정하여야 한다. 인플레를 억제하면서 자유화정책을 쓰면 금융저축이 늘고 금리가 안정되며 고비용·저능률의 체질이 개선될 것이다.
WTO시대에 있어서 금융운영은 고도의 전문지식을 필요로 하게 될것이다. 금융의 자유화와 함께 통화관리의 책임을 중앙은행이 지도록 한국은행법을 개정함이 바람직하다. 그래야만 「스톱-고」의 악순환을 탈피하고 금융운영의 전문성을 살릴 수 있다. 중앙은행도 정부의 한 기관이니만큼 그 「독립」에는 엄연한 한계가 있다. 그러나 경제정책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통화관리의 책임소재가 분명해야 한다.【한은총재고문·전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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