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년 주석올라 26년간 “철옹권좌” 모택동은 1893년 12월26일 호남성 소산에서 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모는 8세때 소산소학교(일종의 서당)에 입학했으나 유학경전암송과 매질에 신물이나 13세에 그만두고 말았다. 모는 16세되던해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근대식교육을 실시하는 동산소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그곳에서 프랑스혁명및 미국의 독립운동사등 서양 근대정치사상에 지적충격을 받고 이에 심취했다. 이어 모는 손문이 주도하는 동맹회가 1911년 청조를 몰락시키고 혁명정권을 수립하자 혁명군에 지원입대했다. 그러나 그는 얼마후 남경정부가 해체돼 귀향해야만 했다. 그해 나이 20세. 모는 장사의 성립제1사립학교에 진학, 그간 관심을 가져온 서양 정치사상에 몰입한다. 그는 재학시 정치학술단체인 신민학회를 조직, 정치에 대한 열정을 더해갔다. 모는 27세때 그의 지적성장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스승의 딸 양개혜와 결혼한다.
중국공산당 창당대회가 열린 1921년 5월 모는 장사대표로 이 대회에 참석하고 같은해 10월 장사에서 공산당 호남성지부를 결성, 성당서기로 노조운동에 전력했다. 그후 1926년 장개석에 의해 국공합작이 깨지고 공산당에 대한 검거령이 몰아쳤다. 모는 호남성에서 노동혁명군을 조직, 농민들의 지원을 업고 추수폭동을 일으켰으나 장개석군에 체포돼 옥고를 치른다. 석방후 그는 추종세력을 이끌고 정강산일대에 소련의 소비예트를 모방한 지역공동체를 만들어 한때 10만여명에 이르는 강력한 홍군을 끌고, 정부군에 맞서 게릴라전을 펼쳤다. 그러나 정부군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쫓겨 마침내 홍군은 정강산을 포기해야 했다. 모는 이후 33년부터 2년간 서안까지의 「2만리 대장정」에 오른다. 모는 이 대장정을 통해 지도력을 인정받으며 공산당 정치국 의장으로 선출된다.
2차대전승리후 국공내전에서 모는 마침내 49년 장을 대만으로 몰아내고 북경 천안문에서 중화인민공화국건국을 선포, 초대 국가주석에 올랐다. 모는 50년대의 백가쟁오 백화제방운동, 60년대의 문혁, 70년대의 비림비공운동등을 통해 잔존 우파세력들을 계속 거세하면서 76년9월 사망하기까지 26년동안 권좌를 지켰다.【장학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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