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능산리 건물터에서 발굴된 백제 공방터와 금동제용봉봉래산향로등 금속제품 70여점은 잃어버린 백제문화사를 복원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동안 백제문화사는 발굴된 금속공예유물등이 많지 않아 그 발전상황이 학계에서 정리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72년 백제 무령왕릉에서 왕과 왕비의 금관식, 팔찌등 백제시대 금속공예유물들이 출토되었으나 이 유물들은 모두 금판을 오리거나 두들겨서 만든 세공제품들이다.
이에 반해 이번 공방터에서 나온 향로를 비롯한 금속제품들은 세공술보다 한 단계 발전된 주조기법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당시 백제문화사 복원에 귀중한 자료를 보탠 것이다.
특히 주조법에 의한 금속제품의 발굴은 백제가 당시 일본에 금속 및 불상 주조기술을 전파했다는 문헌상의 기록들이 모두 사실임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들 제품은 또 백제가 공주에서 부여(사비)로 천도한 직후인 6세기께 백제문화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의 제품이라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완전한 형태로 건물터에서 발견된 금동제용봉봉래산 향로는 그 완벽한 조형으로 인해 미술사학자들도 감탄하는 수작으로 당시에 발달된 백제문화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박산향로는 중국 전국시대 한나라 시대에 생겨난 산악형 형태로 신선들이 향을 피우는 향로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박산 향로가 우리나라에도 전해졌다는 것이 이번 발굴을 통해서 확인된 셈이다.
김정완부여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이 향로의 제작시기를 6세기로 보고 있는데, 다리와 뚜껑에 보이는 봉황의 형태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것이며, 연꽃 문양, 산수화 무늬 등이 모두 6세기에 나타나는 문양과 형태』라고 말했다.
이 향로는 공방터 안 깊이 1백10㎝의 웅덩이에 묻혀있고 그 위를 기와로 덮은 것으로 봐서 전란등 위급한 상황에서 땅속에 묻은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또한 이 향로는 다른 향로들이 대부분 전체 높이가 15∼20㎝ 인 것에 비해 4배 이상 큰 규모인 것으로 보아 왕실용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번에 발굴된 백제 공방터는 출입문이 능산리 고분군을 향한 동쪽에 위치한 것으로 보아 백제 왕족의 분묘에 부장할 금속공예품을 만들기 위한 전용 공방터였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날 유물들을 둘러본 안휘준 교수(서울대 박물관장)는 『이번 발굴은 백제의 회화사, 금속공예사, 사상사 연구에 획기적인 것이다. 더구나 금동제용봉봉래산 향로등 1천4백년전의 유물이 완형으로 발굴된 것은 믿기 어려운 사실이다』고 말했다.【부여=최성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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