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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을 보내며/최상용(한국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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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을 보내며/최상용(한국논단)

입력
1993.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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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사다난했던 1993년도 저물어 가고 있다.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속에 추진해온 위로부터의 개혁은 밑으로부터의 국민의 의식변화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으나 시행착오 또한 적지 않았다.  그동안 우리는 개혁의 참뜻이 무엇이며 누가 그 개혁을 주도하며 그리고 그 개혁의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차근차근 검토해 볼 여유를 가지지 못했으나 지난 9개월간의 개혁실험으로부터 대체로 다음과 같은 합의를 도출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①개혁이 목표로 하고 있는 신한국은 자유, 복지, 평화를 중심가치로 하는 민주국가이며 통일도 그 연장선 위에 있다는 점 ②개혁은 혁명이나 반동에 의한 현상타파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체제의 안정을 위한 체제내개혁이란 점 ③따라서 개혁의 추진세력은 건전한 보수와 양심적인 진보를 결합할 수 있어야 하며 중산층을 중심으로 한 광범한 계층을 그 지지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점.

 그런데 이처럼 개혁의 당위성에 대한 암묵의 합의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경제에 활기가 없고 무내용한 「보혁」싸움을 일삼는가 하면 그야말로 많은 비용에 적은 능률로 국력이 낭비되고 있고 한 단계 더 올라선다는 확실한 전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와중에서 과거 권위주의의 업적에 대한 향수가 공공연히 고개를 드는가 하면 이들 복고적 취향에 대한 개혁세력의 불신도 증폭되고 있다. 세계적 수준에서는 냉전체제가 붕괴되었는데 한반도에서는 아직도 냉전의 대결구조가 완화될 조짐이 없다. 그리고 대한민국안에서도 부질없는 냉전적 갈등이 가시지 않고 있다. 

 이를테면 박정권의 평가를 놓고도 우리는 냉전적 흑백논리의 재현을 본다. 우리가 오늘날 이렇게 잘 살게 된것은 박대통령의 반공·근대화 정책 덕분이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박정희군사정권이야말로 현대 한국의 모든 악의 뿌리라고 매도하는 사람도 있다. 이 두 관점은 자칫 정통과 이단의 맞대결로 이어지기 쉬운데 적어도 학계나 논단에서는 비판적 이성과 균형잡힌 역사감각을 토대로 한 객관적인 논의가 있어야 마땅할것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근대화는 ①산업화 ②합리화 ③민주화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데 이 경우 박정권의 업적은 뭐니뭐니해도 산업화에 있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산업화가 바로 합리화와 민주화의 희생을 강요했다는 점이며 권위주의 정권하의 공업화를 개발독재라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것이다. 산업화는 분명히 큰 업적임에 틀림없으나 그에 따른 엄청난 비용이 과연 필수불가결한것이었는지 아닌지는 좀 더 엄밀히 따져 보아야 한다. 박정권 후반 특히 유신시대에 무고하게 죽어간 고귀한 생명들, 인격파탄을 가져온 가혹한 고문등은 박정권의 산업화 업적만으로는 도저히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권위주의적 산업화와 민주화는 그 과정에서 엄청난 모순관계를 노정하지만 바로 그 산업화의 결과는 민주화의 요구를 낳게 되고 끝내는 권위주의 체제자체의 붕괴를 가져온다는것이 우리의 역사적 경험이다. 따라서 역사로서의 박정권시대를 선악이분법으로 일도양단하기보다 우리도 반세기의 현대사의 연장선 위에 있다는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잘못은 과감히 고쳐나가는 미래지향적 관점에 서야 한다.

 냉정히 생각해 보면 오늘날 우리가 문제삼는 비리·부정등 각종 부패도 1945년 8·15후 우리의 정치사회체제안에서 자생한 구조적 필연이며 우리 국민은 부지불식간에 그 부패구조 속에서 공생해온것이 사실이다. 우리 국민 가운데는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부끄러움없이 살아온 사람도 적지 않겠지만, 지도층의 대부분은 어떤 형태로든 한국형 부패구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렇게 봤을때 그 어느때 보다도 지도층의 총체적 반성이 요구되며 미래를 위한 대화합을 이루어 국가의 최우선 과제인 경제재건에 총력을 기울여야한다. 특히 UR시대, 최적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이 비정한 경쟁시대에 적응해 나가려면 무엇보다 지도층의 헌신과 국민의 통합이 필요하다. 사용자의 금욕과 노동자의 자제를 통한 산업평화없이는 이 난국을 헤쳐나갈 수 없으며 농촌을 황폐화시킨 종래의 정책을 떨쳐버리고 발본적인 구조조정을 해나가야 할것이다. 

 이제 농촌문제는 단순히 경제문제만이 아니라 정치문제, 사회문제이며 나아가 우리민족 공동체의 기본적인 삶 그 자체를 가늠하는 잣대가 되었다. 「개혁」에서 시작하여 「쌀」로 이어진 지난1년간의 정국은 금후 우리가 직면해야할 도전이 얼마나 심각하고 예측하기 어려운가를 예고해주고 있다. 아마 통일도 「쌀」처럼 들이닥칠지 모른다. 부디 새로 출범하는 내각은 심기일전하여 외화가 아니라 내실로, 분열이 아니라 통합으로, 그리고 즉흥적인 땜질이 아니라 차근차근 치밀히 준비하는 쪽으로 개혁의 방향을 이끌어 나가야 할것이다.<고대교수·한국평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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