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 “천” 거사 “우정총국 연회때”/김옥균·박영효·홍영식 등 작전모의/별궁불 신호로 “개혁 만방에 알리자”/수구파대신 살해 계획도 수립… “창덕궁에 장사들 매복시켜라” 갑신년(1884년) 12월1일(양력) 새벽 2시. 김옥균(통리기무아문 협판)은 찬 공기를 가르며 어딘가로 급히 걷고 있었다. 종로 네거리를 지날 때 밝은 달이 장안을 환히 비춰 마치 「은세계」같았다. 그 뒤를 박영효(금릉위)와 서광범(승지)이 따르고 있었다.
『일본을 믿어도 되겠습니까. 만나기로 한 다케조에(죽첨진일랑)공사는 얼굴도 보이지 않고…』
초조해 하는 서광범의 질문에 김옥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30분쯤 뒤 이들은 고래등 같은 집 앞에 멈췄다. 니동(지금의 운니동) 박영효의 집. 김옥균은 교동에 있는 일본공사관에서 시마무라(도촌 구)일본공사관서기관을 만나「거사」계획을 알리고 일본의 군사적 지원을 다짐받은 뒤 돌아오는 길이었다(전날 하오6시30분 김옥균은 「급히 만나자」는 다케조에의 전갈을 받고 일본공사관을 방문했으나, 시마무라가 「다케조에는 급한 일로 나갔다」며 대신 그를 맞았다).
『별궁방화는 이인종(묘동판관)이 맡는다. 이규완 림은명(일본 호산학교 사관졸업생) 윤경순 최은동 4명은 이인종의 지시를 받아 포대 수십개를 만든다.… 불이 잘붙는 석유 30병을 준비한다.… 8시반이나 9시경에 불이 크게 일어남을 신호로 한다』
○7차례 비밀회동
김옥균은 굳게 다문 입을 열어 거사계획을 하나 둘 전달했다. 오늘은 D―3일. 11월 6일 밤 홍영식(우정국 총판)의 집에서 처음 시작한 비밀회합이 이날로 7번째가 된다. 이날 회합은 행동대원들만 참석한 마지막 회합이었다.
이인종 이규정 황롱택 이규완 신중모 림은명 김봉표 이은종 윤경순이 굳은 표정으로 김옥균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거사는 우정국 연회 때 한다. 홍영식은 먼저 4영사의 일정을 파악해 연회 날짜를 정하되 명일로부터 3일을 넘기지 않도록 한다. 윤경순 이은종은 민영익(우영사)을, 박삼롱 황용택은 윤태준(후영사)을, 최은동 신중모는 이조연(좌영사)을, 이규완 박은명은 한규직(전영사)을 각각 처치한다… 연락·정탐·통신은 윤혁로 고영석이 맡는다.…』
김옥균의 입에서는 주도면밀한 거사계획이 계속 흘러나왔다.
『신복모는 동지 「장사」들(전영 병대 중 13명, 모두 합쳐 43명이 참여하기로 했다)과 함께 금호문(창덕궁의 서문. 모든 대신들은 사사로운 일로 입궐할 때 이 문을 통해 드나든다)밖에 매복했다가 입궐하는 민태호(좌찬성) 민영목(보국숭록대부) 조녕하(판서)를 처치한다.(화재나 소란스런 일이 일어나면 이들은 으레 입궐하여 문안해야하므로 이를 노린 것)…』
김옥균은 좌중을 한번 둘러본 뒤 나지막히 말을 끝냈다.
『혼란 중에 아군을 확인할 암호를 정한다. 암호는「천」, 일본말로는「요로시」다』
거사계획은 암호 전달로 끝이 났다. 나라를 똑바로 세워 보겠다는 개화파는 우정국 낙성식을 계기로 개혁의 횃불을 든 것이다. 젊은 개화파의 수구파에 대한 분노는 일찍부터 싹터 왔다.
이보다 5개월여 전인 여름 밤, 분노가 채 가시지 않은 윤치호(통리기무아문주사)는 그날 조정에서 들은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일기에 쓰고 있었다.
「시야입시 문리좌왜·윤고호·좌찬간…」(오늘 저녁 조정에서 이좌영 윤고호 한좌찬간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이조연을 좌영(그릇되고 간사한자), 윤태준을 고호(늙은여우), 한규직을 좌찬간(간사한 좌찬성)이라고 쓸 정도로 대신들을 증오하고 있었다. 이같은 흐름은 개화파 젊은이들에게도 만연돼 있었다.
『천하의 역도들』이라는 말이 당시 개화파들의 입을 떠나지 않을 정도였다.
이광린교수(중부대학장)의 설명.
○일 군사지원 약속
『1881년부터 수면 위로 떠오른 개화파와 수구파의 불신과 대립은 1884년에 이르러 도저히 화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특히 개화파의 중심인물이었던 민영익이 보빙사의 정사로 미국과 유럽을 다녀온 뒤(1884년 5월31일) 수구파로 전향하자 개화파의 위기의식은 고조됐습니다. 한성판윤 박영효는 광주유수로 좌천됐다가 다시 6개월 뒤 광주유수직에서도 물러나야했습니다. 반면 민영익은 10월 외아문협판을 사임하고 한규직 이조연 윤태준과 함께 군대통솔권을 장악하고 서울주둔 청군과의 유대를 강화시켜 나갔습니다』
1884년 서울의 공기는 수구파와 개화파, 청국과 일본의 눈에 보이지 않으나 숨막히는 대립으로 불안한 전운이 감돌았다. 서울 장안에는 곧 난리가 날 거라는 소문이 나돌았고 청군과 조선군의 전영, 좌영, 우영에는 이유가 불확실한 계엄령이 선포돼 있었다.
바로 이때(1884년 10월30일) 1년전 휴가차 본국으로 돌아간 다케조에 일본공사가 서울로 귀임했다. 그의 귀임과, 개화파에 대해 1백80도 반전된 태도는 나름대로의 정세분석과 증대되는 위기 속에서 정변도 불사한 「거사」로 마음이 끌리던 김옥균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하오3시 혼자 다케조에를 찾아갔다. 나는 국내정세를 설명하고 「과거에 까닭없이 당신의 의심과 냉대를 받아 모든 일을 그르쳤다」며 분을 뿜어댔다. 그는 과연 듣던대로 과거와 매우 달라져 있었다. 나를 사사건건 반대하고 심지어 모함도 마다않던 그가 내 말에 구구절절이 찬성하는 것이 아닌가!…>(「갑신일록」(김옥균이 1885년 일본에서 갑신정변을 회고하며 쓴 일기·10월31일)
신용하교수(서울대)의 해석.
『당시(1884년)는 제국주의 열강이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각축하던 시기였습니다. 러시아는 계속해서 남진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을 넘보고 있었고 구미열강도 이권을 챙기기 위해 조선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청국과 일본이었지요. 청국이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형성하려하자 일본이 반발했습니다. 일본정부는 그해 9월 안남지방에서 일어난 청불전쟁을 기화로 조선에 대해 영향력을 강화하려 합니다. 일본은 일단 개화파를 「침략의 통로」로 이용하기로 하고 그들에 대한 정책을 바꿉니다. 다케조에의 변화는 개인의 변화가 아니라 일본 정책의 변화였습니다』
다케조에는 또한 종전의 「백면서생」적 나약함을 떨쳐 버리고 방자하고 대담해졌다.
<…그는 주상(고종)께 일본 외무대신의 이름으로 무라다(촌전)총 16자루를 헌상하고, 전년의 보상금(임오군란 직후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제물포조약에 따라 조선은 일본에 배상금 15만원을 물었다) 40만불을 도로 바치면서 『이는 우리 천황이 귀국의 양병비로 드리는 것이니 결코 다른 비용에 쓰지 마옵소서』라고 말했다. 그는 또 천하대세를 논하고 청불전쟁에서 청국이 쓰러질 형세임을 아뢰고 대원군이 구금되어 있는 상황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며 한바탕 연설을 했다>(「갑신일록」 11월2일)
그의 「방약무인」한 태도는 무엇을 의미할까. 그의 방자한 행동은 계속된다.
11월3일은 일본 천황의 「천장절」. 그는 새로 지은 교동의 공사관에서 축하연을 벌이며 청국 영사 진수당을 「무골해삼」이라고 모욕한다. 이어 11월11일 아무 통보도 없이 총포를 사용한 실전훈련을 실시해 다시 청국과 일본, 수구파와 개화파의 관계를 결정적으로 경색시키는 「도발」을 저지른다.
한밤중에 울려퍼진 느닷 없는 포성은 청군의 무장강화를 가져왔고, 1884년의 긴장과 대립은 「갑신정변」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12월4일.
김옥균은 하오4시 전동에 있는 우정국에 나가 홍영식과 참석자 명단을 확인했다. 초청자 가운데 다케조에, 윤태준, 독일영사만이 불참을 알려왔다. 김옥균과 홍영식은 만족한 표정으로 의미있는 눈짓을 교환했다.
1초1초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날은 저물어 땅거미가 졌다.
저녁6시. 우정국 만찬장에는 18명의 국내외 요인들이 둘러앉았다. 만찬장 답지않은 긴장이 감도는 가운데 김옥균이 옆에 앉은 시마무라에게 나직이 말을 건넸다.
『그대는 하늘(천)을 아는가』『요로시』 <글·서사봉기자 사진·최규성기자>글·서사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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