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편제」 성공은 우리문화의 승리”/“33년간 93편 연출… 초기작품엔 창피/10여년 방황후 우리것 소중함 체득”/“「빨치산 자식」 아픈과거… 「태백산맥」만들며 감회”□인터뷰=김경희기자
한국영화70년사에서 93년은 특별한 해로 기록된다. 림권택감독의 영화 「서편제」가 관객 1백만명(서울개봉관 기준)을 돌파, 한국영화사상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우고 한국영화의 위상을 한껏 높였다(이전의 최고기록은 90년 68만명을 동원한 림권택감독의 「장군의 아들1」). 「서편제」의 열기는 국내에 국한된것이 아니다. 제1회 상해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감독상과 여우주연상(오정해)을 거머쥐었고 미국의 심장부인 워싱턴의 일반극장에까지 상륙했다. 「서편제」의 열기가 식기도 전에 대작 「태백산맥」(태흥영화사 제작)의 연출에 나선 림권택감독(57)을 만나 영화와 인생에 관한 얘기를 들어본다.
―「서편제 신드롬」현상이 일 정도로 올해는 「서편제」의 열기가 거세었습니다. 감독으로서의 감회는 남다르리라고 봅니다.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큰 부담을 느낍니다.「서편제」의 성공은 단순히 영화 한 편의 흥행성공이라기보다는 우리 전통예술의 깊은 맛이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은 문화의 승리라고 생각합니다. 「서편제」의 성공을 이변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이같은 주제의 영화제작이 한 흐름으로 정착돼 우리것을 소재로 한 영화가 사랑받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한국영화의 제작경향으로 볼때 「서편제」는 좀 엉뚱한 기획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요.
▲모든 영화는 흥행성공을 전제로 해서 만듭니다.그러나 「서편제」는 흥행을 염두에 두지 않고 기획을 했습니다. 「장군의 아들」이 히트를 기록, 3편까지 만들다 보니 상업성액션물에 싫증이 나 흥행은 안되더라도 좀 산뜻한 영화 한 편 만들어 보자는 생각에서 시작을 했지요. 태흥영화사에서도 「장군의 아들」시리즈로 돈을 벌었던터라 흥행을 의식하지 않고 작품성있는 영화 하나 남기라고 배려를 한 것인데 그만 흥부네 박이 됐어요. 마음을 비운것이 성공의 비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정래씨의 대하소설을 각색한 영화 「태백산맥」의 촬영을 이달초 시작했는데 어떤 영화로 만들 생각인지요.
▲인본을 우선으로 하는 사람 이야기를 가슴저리게 그려볼 생각입니다. 이데올로기 그 자체를 그리기보다는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많은 희생을 불러왔고 인간성을 파괴했는가에 초점을 맞출 계획입니다. 이 영화는 한 시대를 조명한 화제의 대작을 영화화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니지만 내게는 남다른 감회를 주는 작품입니다. 그동안 애써 지우려 했던 빨치산의 자식이었다는 아픈 과거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거에 의한 개인감정이나 편협된 관점에 얽매이지 않고 객관적 시각에서 민족의 수난사를 정리해 볼 생각입니다. 또 빨치산 얘기를 정면에서 다룬다는것은 나 자신 빨치산 콤플렉스를 벗어났다는 증거가 될것입니다.
―빨치산 콤플렉스란 무엇을 뜻하는지요.
▲전남 장성에서 출생한 나는 누구보다도 힘겨운 가난과 이산, 민족분단의 비극을 몸으로 겪으며 성장했습니다. 좌우익의 대결이 치열하던 시절 우리집안은 좌익이었습니다. 「찬탁」 「반탁」의 의미도 모르던 어린시절, 찬탁삐라를 써서 동네 어귀에 붙이고 다녔습니다.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도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고 급기야 어머니는 극약을 먹고 자살을 기도했습니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6·25전쟁이 일어나자 우리 일가는 나와 동생을 빼고 모두 입산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갈무렵 아버지가 자수하고 돌아왔지만 빨치산이던 삼촌이 죽는등 집안은 쑥밭이 됐지요.
―그 후의 생활은 어떠했는지요.
▲빨치산의 자식이라는 손가락질과 가난, 소외감을 견딜 수 없어 고교1년때 가출해 부산으로 갔습니다. 각지 사람들이 뒤섞인 피란지에서 나를 숨기고 빨치산의 자식이었다는 과거를 감추고 살고 싶었습니다. 세상 일에 무관심하려 애썼고 자신에게도 냉정했습니다. 내가 말을 심하게 더듬는것도 어쩌면 이러한 성장과정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태백산맥」은 작품의 규모나 내용으로 보아 우리 역사의 한 대목을 정리하는 대작이라고 생각됩니다.
▲「태백산맥」은 좌우익의 대립이 표면화된 48년의 여순반란사건부터 시작됩니다. 원작은 잘 알려졌듯 이때부터 전쟁이 끝나 빨치산이 섬멸당한 53년 여름까지 5년여에 걸친 민족상잔사를 전 10권의 대하장편소설로 그리고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이것을 2시간짜리 1·2부로 압축하려 합니다. 1부는 내년말까지, 2부는 95년까지 완성할 계획입니다. 지난10월말부터 전국을 돌며 촬영지를 물색, 강화도와 전남 영광 벌교 구례등지를 촬영지로 정해놓고 있습니다. 또 벽제 오픈세트장에는 50년대초의 벌교읍을 재현해 상당부분이 이곳에서 촬영될것입니다. 시나리오 작가 송능한씨가 각색을 했는데 시나리오가 영화의 재료인만큼 10여차례 고쳐썼고 아직도 손질이 덜 끝난 상태입니다. 내년초부터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될겁니다.
―「서편제」가 빅히트를 기록했고 화제를 모았기 때문에 「태백산맥」에 쏠리는 관객들의 관심도 클텐데 부담되지 않는지요.
▲부담되지 않을리가 있습니까. 다만 예술성과 흥행성을 함께 갖춘 대작을 만들겠다는 과욕을 버리고 관객들이 공감하는 우리의 이야기를 담을 생각입니다. 주요인물만도 72명이나 되는만큼 각 배역의 성격규정에도 어려움이 따르긴 하지만 많은 인물들이 얽히고 설켜 일으키는 사건을 재미있게 그려낼 각오입니다.
―정규 영화수업은 받지 않았던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영화계에 발을 딛게 되었는지요.
▲제 학력은 고1중퇴가 전부입니다. 20세전까지만해도 영화에 관심이 없었고 가까이 할 기회도 없었습니다. 가출후 부산에서 처음 한 일은 막노동 지게꾼이었어요. 당시 밑천없이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일이었지요. 그러나 워낙 몸이 약해 오래 버티지 못했습니다.그래서 미군부대에서 헌 군화를 불하받아 파는 장사를 했습니다. 이때 이규환감독의 「춘향전」이 큰 돈을 벌었다는 소문이 나자 돈을 좀 쥔 군화중간상들이 영화판에 뛰어들기 시작했어요. 저도 장사를 집어 치우고 정창화감독그룹에 끼이게 됐습니다. 처음엔 배우 스태프들의 식사심부름을 했습니다. 이어 소도구조수 조명조수등 막노동이나 마찬가지 일을 했지요. 영화를 예술로 생각한것도 아니고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포부도 없었습니다. 먹고 살기위해 영화판에서 일하다 보니 영화감독이 된겁니다.
―61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감독에 데뷔한후 초기 10여년간은 멜로·액션물등 주로 흥행작에 치중,태작이 대부분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는데….
▲지난 33년간 모두 93편의 영화를 연출했는데 이 가운데 3분의2정도가 감독초기 10여년동안에 만든것입니다. 1년에 5∼6편씩 오락영화를 마구잡이로 찍어냈지요. 이 시기는 한국영화사에서 지워버리고 싶을만큼 부끄럽고 그때 필름들을 불태워버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왜 그렇게 작품을 남발했는지요.
▲60년대의 나는 삶에 애착이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되는대로 살았다는 표현이 적절합니다. 현실을 직시하기가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10년간 60여편의 영화를 찍었지만 단 한편도 내가 작품을 선택해 본적이 없습니다. 제작자가 주는대로 맡았고 찍자는대로 찍었지요. 또 찍는것마다 흥행에 성공한 편이어서 굳이 고민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삶에 대한 희망이나 애착이 없으니 매일 술과 일뿐이었어요. 그러다 생각이 바뀌었지요. 세상이 나를 버렸다할지라도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뭔가 가치있는 일을 해야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리고 그 길은 상업주의에 영합하지 않고 작가의 혼이 배어있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이러한 자세로 만든 영화가 문예물인 「잡초」(73년)이고 이때부터 작품성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습니다. 한 마디로 철이 좀 늦게 난 편이지요.(웃음)
―마구잡이로 찍었다고는 하지만 한편 두편 만들다 보면 일관된 주제도 있고 작가관 같은것도 생길텐데요.
▲「잡초」이전까지는 습작기였다고 치고 논외로 하겠습니다. 그후 73년부터 80년대말까지 만든 영화들은 두가지 현상을 엿볼수 있습니다. 첫째는 「족보」(78년) 「짝코」(80년) 「길소뜸」(85년)등에서 알수 있듯 우리민족의 수난사를 일관되게 점검하는 주제의식을 갖게됐고, 둘째는 이같은 소재를 인본주의바탕에서 그려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잡초」이후 내가 깨달은것은 영화란 궁극적으로 인간들이 엮어내는 드라마이므로 인본이 바탕을 이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데올로기도 인본으로부터 벗어나서는 안되고 민주주의도 제도보다는 인간의 존엄성에 기초해야 하며 영화도 이러한 바탕 위에서 만들어져야 한다는게 나의 영화철학입니다.
―앞으로의 연출방향과 계획은 무엇인지요.
▲이젠 영화를 떠난 임권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관객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작품으로 영화일생을 마감하고 싶습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리문화나 역사를 본격적으로 조명한 작품을 만들어 세계시장에 도전할 계획입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