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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쪽판사가 재상올랐다/소신외길 이회창신임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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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쪽판사가 재상올랐다/소신외길 이회창신임총리

입력
1993.1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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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렴·강직”… 차례 사표경험/5공땐 「소수의견」으로 눈총받기도 대쪽판사가 이번에는 총리가 됐다. 평생을 법관으로 지내고자 소망했던 「이회창대법관」이 중앙선관위원장, 감사원장등의 외도끝에 16일 일인지하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것이다. 어려웠던 군사정권시절 정연한 법이론과 굽힐줄 모르는 소신으로 외로운 법관의 길을 걸어오며 「살아있는 헌법」이라 불린 이신임총리는 청렴하고 깨끗한 문민정부를 바라는 국민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다.

 35년생인 이신임총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최고 엘리트코스를 밟아왔다. 그는 한번도 장외로 뛰어나가지는 않았으나 현실과 타협치 않는 강직한 성품으로 내외의 흠망을 받아왔다.

 왕년에 「척결검사」로 이름을 날리며 검찰내에서 신망이 두터웠던 전서울지검장 이홍규옹(87)을 부친으로 둔 유복한 법조인 집안에서 태어난 이신임총리는 줄곧 「수재」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6·25전쟁을 거치며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약자를 보호하는 법관」을 꿈꾸며 서울대법대에 진학했고 4학년때인 56년 고시8회에 합격, 60년 약관 25세의 나이로 서울지법 인천지원판사로서 법원의 문에 들어섰다.

 법관이 된지 2년여쯤 됐을 때 그에게 군사정권이 무엇인가를 알게 한 첫번째 「시련」이 닥쳤다. 5·16후 타의에 의해 혁명재판소 1심재판부에 속하게 됐다. 혁명재판을 맡지 않겠다는 이유만으로도 구속된 사람이 있었을 정도로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이었다. 「민족일보사건」을 맡았지만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밝혔다가 윗사람으로부터 『너같은 사람때문에 혁명을 해야해』라는 말을 듣고는 첫번째 사표를 냈다. 그러나 혁명재판소 2심재판부에 속해있던 고김홍섭판사가 『이럴땐 참아야 한다』며 위로하는 바람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지금도 이신임총리는 서슴지 않고 그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는다.

 산적한 재판업무속에서도 이신임총리는 늘 실력있는 판사로 지목될만큼 법률서적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때문에 71년 예비법조인의 교육기관으로 사법연수원이 생겼을 때 36세의 나이로 교수에 발탁됐다. 그의 깐깐한 강의와 넘치는 열정을 현재 부장판사와 부장검사자리에 올라있는 제자들은 지금도 모이면 화제에 올리고 있다.

 출퇴근시간이 따로 없던 당시 법원풍토와는 달리 부장판사가 되어서도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한것으로 알려진 그는 77년 차관급인 서울고법부장판사가 되고 80년에는 법원행정처기획실장으로 법원의 살림살이를 도맡는다. 법원내에서 계속 선두주자로 달려온 그가 5공정권에 의해 81년 「최연소대법원판사」(당시에는 대법관이란 명칭 대신 대법원판사를 사용)가 된것은 기연이랄수 있다.

 고박정희대통령시해사건과 김대중내란음모사건재판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소수의견이 나왔다 해서 아직 임기가 남아있는 대법원을 전면개편한 신군부세력이 그를 발탁한것이다. 당시 신군부는 사법부내의 반발을 무마하면서 개혁적 이미지를 부각한다는 명목으로 「가장 실력있는 젊은 판사」를 수소문했다는것이다. 후일 이신임총리가 이일규전대법원장과 함께 「소수의견판사」로 떠오르자 신군부세력은 두고두고 후회한것으로 알려지고있다.

 45세로 대법원판사가 된 이신임총리는 86년 임기만료로 물러날 때까지 맡은 46건의 전원합의체사건에서 무려 10건이나 소수의견을 냈다. 그 시절에는 민심이 다수의견을 외면하고 있던 때였으나 그는 『소위 대법원판사라는 사람들이 헌법도 모르고 재판을 하느냐』고 호통을 치며 소신을 지켰다.

 2년여의 변호사생활뒤 6공정부가 출범하면서 사법부내에서 제기된 개혁의 목소리를 타고 그는 유력한 대법원장물망에 올랐으나 선배인 이일규대법원장에게 양보하고 다시 대법관이 된다. 이와 동시에 중앙선관위원장직을 맡았으나 그는 생애 두번째 사표를 낸다. 89년에 치러졌던 동해시재선거에서 4당후보와 선거사무장을, 영등포을구재선거에서는 3당후보를 선거법위반혐의로 고발했으나 검찰은 대부분 무혐의처분해버렸다. 『불법선거운동을 막고자 최선을 다했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해 도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는 그의 사직의 변은 역시 「대쪽」이었다.

 당시 통일민주당총재였던 김영삼대통령은 그때 이신임총리를 눈여겨보며 그의 소신과 청렴성을 마음 깊이 새겨둔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때문에 지난2월 새정부가 출범할때도 총리후보에 올랐다가 감사원장으로 발탁됐다.

 서울이 고향인 이신임총리는 부친외에도 대법관을 지낸 한성수씨가 장인이며 작고한 한국화학계의 태두 이태규씨가 백부이다. 부인 한인옥씨(55)와의 사이에 2남1녀를 두었으며 최명석검사가 사위이다.【신재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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