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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악한 시설/낡은 책걸상부터 바꾸자(초등교육을 살리자: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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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악한 시설/낡은 책걸상부터 바꾸자(초등교육을 살리자:9)

입력
1993.1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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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운동장·조명·냉난방등 대책시급/「창의적 성장」돕는 질적개선도 병행을 서울 노원구 중계동의 불암산자락을 향해 가다보면 산기슭쪽으로 레고 장난감 모형과도 같이 아기자기한 현대식 학교건물이 눈에 띈다. 빨간 벽돌, 초록 지붕에 세모·동그라미·네모꼴 건축물들이 배합돼 위에서 보면 마치「불」자에서「ㅂ」을 뺀 형태를 하고 있는데 건물의 배치가 주변환경과도 썩 잘 어울린다. 둘레에 아스콘 트랙이 깔린 운동장 한켠에선 함박웃음을 머금은 아이들이 나무로 된 정글짐에 매달려 왁자하게 떠들며 장난을 치고 있다. 

 「얘들아, 언제나 함께 하고 즐겁게 공부하고 신나게 뛰어놀자」. 건물 외벽에 내걸린 집채만한 플래카드와 글귀도 인상적이지만 다른 쪽 벽에 나붙은 예쁜 걸개그림에도 자꾸 눈길이 간다. 낮은 담벼락에서부터 불암산봉우리들이 시원스럽게 한눈에 들어오는 옥상의 놀이공간에 이르기까지 아늑함과 평온함이 교정 곳곳에 배어 있다.

 서울불암국민학교. 국민학교 교사라면 으레 우중충한 분위기에 낡고 멋없는일자건물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 학교는 여러모로 기존 학교건축양식에 파격과 변혁을 시도한 미래형 학교이다. 교문을 들어서면 학교건물이 정남향을 하고 꼬불꼬불 이어져 있는데 처음 온 사람은 한동안 미로찾기를 해야 할 만큼 출입구와 통로가 많다. 중앙의 행정관리동 쪽으로 나있는 포장로는 배수를 고려, 비스듬히 경사져 있다. 운동장은 3개로 나뉘어 있다. 대운동장은 5·6학년이 쓰고 1·2, 3·4학년용은 학년동 앞에 따로 마련돼 있어 쉬는 시간이나 체육시간에 몸집 큰 상급생들의「독점」을 방지하고 있다.

○미래형학교 바람직

 건물 내부도 밝고 환하다. 난방·조명시설등이 잘 돼있는 교실과 복도는 학생들의 정서발달을 고려해 1·2학년은 연분홍색, 3·4학년은 초록색, 5·6학년은 연두색등 학년마다 색깔이 다르게 칠해져 있다.

 1·2학년의 경우 교실사이에 화장실과 유리칸막이가 된 교사연구실이 있고 3학년 이상은 층마다 학년별 교사연구실이 마련돼 있다. 2개 학급이 동시에 수업할 수 있는 첨단시설의 시청각실, 7백명까지 수용하는 다목적 실내체육관, 컴퓨터실, 과학실, 도서실등 특별교실과 부속시설을 두루 갖춰 학생들이 재능과 소질을 계발·연마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집처럼 편하고 마음껏 뛰놀며 공부할 수 있어 학교 다니기가 신나요』 불암국교 어린이들의 표정은 잘 꾸며진 미래형 학교시설만큼 밝고 깨끗하다.

 이제 우리 교육현실로 눈을 돌려 보자. 교육부가 학교시설 현대화계획에 따라 38억원을 투자, 지난해 11월 착공해 올해 2학기에 개교한 시설시범학교인 불암국교는 우리 현실에선 여전히 「미래형」이니 「21세기형」이니 하는 거창한 관형어를 얹어야 제격이다. 49학급 2천8백여명의 불암국교 학생들은 삐걱거리는 책·걸상과 씨름하고 겨울이면 새벽같이 조개탄 갈탄 괴탄(괴탄) 왕겨탄등의 연료를 타기 위해 양동이를 들고 창고앞에 줄서야 하는 대다수 어린이들에 비하면「선택받은 아이들」임에 틀림없다.

 정부차원에서 뒤늦게나마 교육시설의 현대화에 관심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시설시범학교」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낙후된 교육시설의 현주소를 반증해 준다.

 『난로를 때는 겨울이면 수업은 뒷전이 됩니다. 1교시와 마지막 교시는 불을 피우고 끄느라 대부분을 허비하게 됩니다. 난로옆 아이들은 통닭신세지만 찬바람이 솔솔 들어오는 창가의 아이들은 덜덜 떨 만큼 온도차가 심해 수업중 수시로 자리를 바꿔주어야 합니다. 수거식 화장실 앞에서 순서를 기다리느라 발을 동동 구르는 아이들, 흐린 날이면 칠판 글씨가 잘 안보일 만큼 침침한 교실, 체구에 맞지 않는 낡은 책·걸상…교육과정과 내용은 수없이 변해왔지만 학교시설은 30년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습니다』

 서울상암국교 6학년 담임교사 박춘근씨(40)는 아이들이 부모세대와 똑같이 낙후된 교육환경에서 배우는 현실에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도서·벽지 더심각

 93년도 교육통계연보에 의하면 전국에는 6천57개 국교 11만1천8백33개 학급이 있는데 4백33만6천2백여명의 학생수에 비해 교실의 절대수만도 3천64개나 부족하다. 전문가들은 과밀학급, 거대학교문제의 해소를 위해선 교실을 1만5천여개는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학교시설및 설비기준령에 의무시설로 규정된 도서관(실)은 2천5백45개교(42.0%), 강당은 4천5백49개교(75.1%), 시청각실은 4천9백7개교(81.0%)가 보유하지 못한 상태이다. 

 시설의 낙후성은 더욱 심각하다. 교육부가 올해 국회국정감사때 제출한「국민학교 규격미달및 노후 책·걸상현황」에 의하면 전체 4백5만4천여개의 책상과 걸상중 낡고 오래된 것이 13%인 52만7천여개, 규격미달품이 2만9천여개(0.74 %)이다. 특히 도서·벽지지역은 대부분의 책·걸상이 폐기직전 상태이다.

 전교조가 지난 6월 한달동안 전국의 초중고교를 대상으로 실시한 실태조사에서도 국·공·사립국교 9백17개교중 31.3%가 난방수단으로 아직도 목재·톱밥을, 19.7%가 조개탄·석탄을, 40.5%가 석유·가스를 사용하고 있으며 스팀이나 온풍기를 쓰는 곳은 1.0%에 불과했다.

 지금 일선 교육현장에선 우리 교육이 이룩한 양적 성장 못지 않게 질적 성장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교육시설의 질적 개선은 산술적으로 새 학교를 몇개 더 짓는다든가 낡은 건물을 증·개축하는 일만을 의미하지않는다. 그것은 외형적 팽창의 그늘에 가려졌던 아이들과 교사, 학부모등 우리 교육주체들의 권리를 되찾아 주는 포괄적 행위이자 우리의 미래에 대한 장기적인 투자이다.

 그러나 광복 50년이 가깝도록 교육시설의 확충과 개선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왔던가. 교육시설만으로 보자면 우리는 2세교육에 무신경하고 거의 관심이 없는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다. 체육교육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운동장의 경우 90년에 문교부(당시)는 대도시의 교지확보난을 덜고 과밀학급 거대학교 발생을 막는다는 취지에서 운동장없는 학교(교사등 기본시설만 갖추고 운동장은 인근 사회체육시설을 활용하는 학교) 설립을 추진했다가 반대여론에 밀려 백지화하기도 했다.

 성신여대 교육학과 유향산교수(52·여)는『학교시설은 아이들이 창의적인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며 『교육시설 개선을 위한 노력도 이런 철학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한국교육개발원 김흥주 연구원(인터뷰)/“교육시설현대화 량보다 질향상 역점/쾌적·능률적인 수업분위기 조성해야”

 『학교시설은 교육목적과 목표를 달성하는데 필요한 물리적 환경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학교시설은 능률적인 수업과 쾌적한 학습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교육효과의 극대화에 기여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교육시설은 늘어나는 교육인구 수용을 위해 양적으로만 확충돼왔지 질적 차원의 개선은 거의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변화되는 교육내용과 학교의 기능에 보조를 맞추지 못한채 낙후돼온 것입니다』

 한국교육개발원 교육정책연구본부 선임연구원 김흥주씨(38·사진)는 교육의 질적 성장을 위해서는 열악한 교육시설의 질적 개선과 현대화가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학교시설은 교육적 필요를 충족해야 할뿐 아니라 안전성, 건강성, 심미성, 편리성, 융통성등을 두루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의 교육시설은 이런 모든 기준에서 볼 때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우선 시설의 절대수가 태부족하고 그나마 있는 시설은 낡고 낙후된데다 지역간 격차가 심합니다. 또 실내 조도(LUX)기준조차 없는 열악한 조명시설, 후진적인 난방·통풍방식, 재래식 화장실등 비위생적인 환경이 학생들의 건강을 해치고 있습니다. 미관을 고려하지 않은 획일적인 장방형 건물, 교수-학습체제의 변화에 적응이 불가능한 융통성없는 각종 시설, 설치만 해놓고 버려두는 시설관리체제에 이르기까지 지적할 사항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김연구원은 교육시설의 중요성을 간과해온 행정당국과 국민들의 발상전환부터 필요하다고 말한다. 교육예산의 10%정도에 불과한 정부의 교육시설투자를 지금부터라도 시설 개선·현대화에 우선순위를 두어 지속적으로 늘리고 학교시설계획이 합리적으로 마련되도록 체계적인 연구도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현재 단국대교육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김씨는 83년말부터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87년에 학교시설 현대화를 위한 문교부(당시) 정책연구사업에 참여하는등 주로 교육시설 분야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특별취재반◁

임철순 부장대우/이대현 김현수 하종오 장인철 김병찬 변형섭 김범수기자(사회부)/신상순 고영권기자(사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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