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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려난 5공 속죄양/이영섭 사회부기자(기자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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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려난 5공 속죄양/이영섭 사회부기자(기자의 눈)

입력
1993.1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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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세동씨(57)만큼 인생역정에 급격한 굴곡을 겪고 극단적으로 엇갈린 평가를 받은 인물도 드물것이다. 15일 법원의 구속집행정지결정으로 다시 석방된 장씨는 79년  「12·12 사태」에 주역으로 가담, 육군대령에서 단숨에 권력정상부에 떠 올랐다. 전두환전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대통령경호실장을 거쳐 안기부장직에까지 올라 국내정치를 「요리」했고 한때는 대권후보대열에 든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이「화려」했던 전성기에 그는 권위주의 권력의 지주로서 때로는 공포와 원한의 대상이 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가 떠받쳤던 5공의 종식과 함께 5공의 과오를 앞장서 변호하고 그 「죄업」을 도맡아 짊어지는 속죄양역을 하면서 어느덧 「의리의 돌쇠」란 애칭으로 불리는 일대변신을 이뤘다.

 5공청문회에서 시종 한치의 흐트러짐없는 그의 모습은 어쨌거나 『전대통령이 사람하나는 잘 골랐다』는 호사가들의 평을 남겼다. 이어 5공비리수사와 용팔이수사에서도 당당하고 치밀한 자세로 수사검사들의 혀를 내두르게 했다.

 당시 검찰은 「아무리 털어도 먼지가 나오지 않는데」라며 고심하다가 대통령경호실법의 직권남용혐의로 그를 옭아 넣었으나 15일 법원은 이 부분에 무죄를 선고했다.

 장씨는 석방후 곧장 전전대통령을 찾아가 큰절과 함께 『휴가 잘 다녀왔습니다』라고 「신고」한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집전화번호를 「×××―5050」으로 사용할 만큼 5공에 대한 자부심으로 살고있다.

 그러나 장씨의 개인적 품성과 역사적 평가는 다를 수도 있을것이다.

 「12·12」당시 군인으로서 직속상관의 명령보다는 월남참전이래 인연을 맺은 전전대통령의 뜻을 따라 군권에 이어 대권장악및 유지에 그야말로 신명을 다했던 장씨에게는 「봉건적 충성의 표본」이란 냉정한 평가가 붙어 있다.

 15일 석방되면서 내뱉은『역사의 평가는 고무줄처럼 늘릴 수 없다』는 장씨의 말이 자신에게는 과연 어떻게 적용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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