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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하라(추원)의 조선전쟁/박용배 본사통일문제연구소장(남과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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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하라(추원)의 조선전쟁/박용배 본사통일문제연구소장(남과북)

입력
1993.12.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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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기하라 요(추원 요)씨는 72년5월부터 73년4월까지 일본 공산당 기관지 「적기」지의 평양특파원을 지냈다. 89년 여름에는 세계일주 여행중 워싱턴 국립공문서 보관소에서 50∼53년 한국전쟁중 미군이 북에서 가져온 방대한 문서더미를 봤다. 그는 89년9월20일에 평양의 경험을 「서울과 평양―혹원료의 남과 북 탐방기」라는 책을 냈다. 90년2월에 서울에서 다나출판사가 번역출판했다.

 11일에는 동경에서 90년1월부터 2년6개월동안 미국에서 한국전 관계문서를 뒤진 끝에 「조선전쟁―맥아더와 김일성의 대모략」이란 책을 문예춘추사에서 발간했다.

 그는 동학혁명을 연구하기 위해 5개월여동안 서울에 머무르다 책 출판관계로 동경에 갔다. 자그마한 키에 머리는 조금 벗겨진 안경 낀 56세의 그. 필자가 본 인상으로는 법없이도 살 사람같이 부드럽고 예의바른 일본인이었다. 그러나 1백60만쪽의 한국전쟁에 관한 문서를 꼼꼼히 읽을 정도로 마음속이 단단한 사람이다.

 한국일보 통일문제연구소에도 세차례나 들러 보잘것 없는 자료를 복사해가고 별로 대단한 지식도 없는 필자에게 여러가지를 조심스럽게 묻는다. 그를 만나고 난 후에는 그의 첫번째 책인 「서울과 평양」을 되십어 읽어본다. 왜 그는 그가 속한 일본공산당의 우당인 조선노동당에 등을 돌렸을까.

 「서울과 평양」에는 그 이유가 산뜻하게 표현되어 있다. 72년5월23일 평양에 부임해 73년4월17일 추방될때까지 그는 쓸쓸하고 씁쓸한 평양을 봤다. 「빈한한」 「웃음이 없는」 「거짓말 투성이」 「거대한 허위」의 사회가 북이었다 (「남과 북」·한국일보사간·안가보고도…」의 항 참조).

 그는 72년11월2일 평양교외 헬기 착륙장에서 남북조절위 남쪽 대표단 부대표였던 한국일보사 사주인 장기영전부총리의 모습을 지켜봤다. 이때 붉은 스카프와 꽃다발을 올렸던 소녀가 87년 KAL기 폭파사건의 하치야 마유미(봉곡진유미), 김현희였음을 현장의 기록을 되새겨 88년3월 일본에서 폭로했다.

 이때 북의 「중앙통신」은 그가 평양에 있었던 사실을 확인하면서 장사주에게 꽃다발을 준 소녀는 김현희가 아니라고 했다. 『그가 촬영한 한장의 사진을 가지고 괴뢰집단의 모략선전에 한 역할을 담당하는것을 본다면 정신착란증에 빠져들었는지, 매수되었는지 이해하기 힘들다』고 했다.

 그는 아무 대꾸없이 또다른 3장의 사진을 일본공산당의 반월간지 「그라프 안녕하십니까」에 실었다. 북과 조총련은 남의 김현희 조작설을 그후는 되풀이하지 않았다.

 그는 이번 「조선전쟁」에서 실증으로 북의 남침설을 증명하려 한다고 했다. 『일본의 지식인 양식인들들은 IF 스톤이 쓴 「비사 한국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때 이들은 맥아더 미군정이 조선연맹(조총련의 전신)해체, 일본공산당 불법화시도, 국철노동자의 해고등에 나서자 이승만과 맥아더의 북침설에 편향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내 책에는 남침설이 명백히 드러나 일본 지식인에게 큰 충격을 줄것이다. 또한 맥아더 사령부가 남침의 여러 정보를 알고도 이를 묵살한것은 미국에서의 군부 우익세력의 음모성이 짙다』고도 했다.

 그의 「조선전쟁」이 사실을 토대로 북이 왜 침략했는지를 밝혀주기를 바란다. 그는 한반도가 통일되지 않는 이유중 가장 큰 이유는 수령이 6·25를 일으켰고 이에 파생된 1천만 이산가족 발생등의 근본원인이 수령 스스로에 의해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고있다.

 또한 북인민들 속에서 50년 6·25직전, 직후 전쟁을 반대하는 「비겁자 유언비어 유포자 우울분자(민족에 총부리를 댈수 없다는 반전주의자)」등이 상당수에 달했다는것이다.

 『6·25는 수령이 북과 남의 인민들을 상대로한 전쟁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북의 인민  남의 국민이 수령의 한반도공산화음모의 희생자였다』고 그는 강조해 말했다.

 하기하라 료는 그의 세번째 필명이다. 본명은 사카모토(파본고부), 김지하의 시집을 71년 일본에서 첫번째로 번역할때는 시부야(삽곡선태랑)  그리고 하기하라(혹원 요)다.

 그 이름의 연유는 그의 마음을 대변한다. 『가다가 가다가 쓰러져 엎어져도 싸리(혹)의 들판(원)』이란 어느 시에서 따왔다는것이다. 『걷기를 계속해서 비록 쓰러진다 하여도 싸리나무의 잠자리라고 하는 낙천성. 온 일면이 싸리나무인 들판은 인민의 평원이라고도 말할수 있으리라. 그것을 믿고 그 속에 사는 것이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공산주의자가 된것은 그때의 환경 때문이었다. 무슨 큰 주의에 매료됐다고 착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평양과 수령과 지도자가 던져준 공산주의의 실체는 삭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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