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죽음·불신 충격속 폐촌으로/마음상처 조속치유 「옛날되찾기」 고대 2백92명이 수장되는 참사를 지켜본 위도는 지금까지도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채 폐촌으로 변해가고 있다. 풍어기인 음력 스무사흘(10월 9일)에 맞춰 몰려든 외지 낚시꾼들과 섞여 서해훼리호에 탔던 위도주민 58명은 10월10일 아침 삶의 터전이자 희망이었던 바다에서 영원히 잠들었다.
배와 운명을 함께 한 백운두선장(56),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취직한 큰 아들과 자랑스럽게 승선했던 장봉환조기장(57)등 승무원· 주민들은 한과 슬픔으로 더욱 시퍼래진듯한 통곡의 바다에서 시체로 떠올랐다.
이상향 율도국이 있었다는 전설이 무색하게 40여가구 2백여명이 북적거리던 파장금항에는 이제 70여명만 남았고 식도리·대리등 위도 전지역에 한집 건너 폐가가 늘어가고 있다. 하루 한번씩 다니던 여객선은 사고후 두번씩 다니고 있지만 관광객의 발길은 끊겼다.
밑도 끝도 없는 선장생존설에 시달렸던 부인 김효순씨(52)도 『남편없는 섬이 무섭다』며 지난 4일 동이 트자마자 친척이 사는 안양으로 옮겨갔다. 김씨는 사십구재를 지낸 지난달 27일 짐을 꾸린뒤 풍랑이 잔잔해지기만을 기다리다 울면서 섬을 떠나갔다. 당시 『끝까지 배를 지킨 사람을 비겁한 도망자로 몰아온 수사기관과 언론이 원망스럽다』고 울부짖었던 김씨는 여객선이 드나들 때마다 남몰래 눈물을 흘리곤 했다. 유일한 말상대는 사고후 시중을 들기 위해 와있던 큰며느리 김은주씨(27)였으며 7개월된 손주 승희가 위안이었다.
김씨는 안양에 찾아간 기자에게 『할 말은 다 했다. 모든걸 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면서도 『25년간 주민들을 위해 봉사해온 남편의 죽음이 헛되지 않길 바랄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차가운 눈초리를 보낸 주민·수사기관·언론의 불신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은 듯했다.
김씨만큼이나 고초를 겪었으면서도 김씨를 격포항까지 배로 태워다 준 파장금항 주민 장권만씨(56)는 『피해를 입혀 미안하다』는 김씨의 말에 다시 한번 눈물을 애써 삼켰다. 사고현장에 접근, 44명을 구조한 종국호(선장 이종훈·9톤급)와 달리 자신의 배(일성호·15톤급)에 탄 낚시꾼들의 성화때문에 이들을 파장금항에 내려놓고 나서 달려간 장씨는 한 사람도 구할 수 없었다. 현장 부근에 있었으면서도 도망쳤다는 주민들의 눈총에 시달렸던 장씨는 백선장이 큰 어선에 구조돼 파장금으로 갔다는 소문이 퍼진 뒤에는 선장을 도피시켰다는 의혹까지 사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아야 했다.
『당시 분위기에선 문민정부가 아니었다면 고문까지 당했을것』이라는 장씨는 전경들과 유가족들을 밤새 실어 나른 공은 간데없이 「몹쓸 놈」이 돼버렸다. 장씨는『격포까지 가는 동안 줄곧 위도를 바라보며 우는 김씨를 보면서 사고당일 날씨걱정을 하며 안절부절하던 백선장이 떠올랐다』며 『모든것을 잊자는 부인의 말대로 그 동안의 고통이 사라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생일을 집에서 쇠려고 고향을 찾았다가 숨진 신길송씨(50·경비원)의 아버지 신서균씨(73)는 시름시름 앓다가 한달만인 지난달 11일 홧병으로 숨져 부자가 모두 선산에 묻혔다. 남편과 장남을 먼저 보낸 김춘복씨(72)가 병에 시달리면서 장님인 막내아들 종기씨(47)를 보살피며 단둘이 살고 있다. 생활보호대상자에게 지원하는 구호품이 생계수단의 전부이다.
어쩔 수 없어 떠나지 못했든 차마 고향을 버리기 싫어 남아 있든 주민들은 보상문제와 정부가 발표한 위도개발계획이 하루빨리 실현되기를 바라고 있다.
위도는 우리에게 무엇이었을까. 위도는 정부의 획기적 지원을 받으면 회생될 수 있을까. 우리 모두의 인간에 대한 불신은 어떻게 해야 치유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던져놓은채 93년이 저물어가고 있다.【위도·안양=이종수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