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은 죄―회개―용서―갱생이라는 기독교적 구원의 패러다임을 충실하게 따른 일종의 도덕극이다. 극은 리어왕이 성급한 성격적 결함때문에 판단을 잘못해 악한 두딸을 축복하고 선한 막내딸을 저주함으로써 몰락의 구렁텅이에 빠지지만 마침내 자신이 부당하게 학대한 그딸로부터 용서를 받으며 정신적으로 갱생하기까지의 긴여로를 따라간다. 호주 멜번의 플레이박스극단이 레크 마츠키에비치의 연출로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한 리어왕은 일단 원작을 회상극으로 성형수술한다. 즉 리어가 죽는 원작의 마지막 장면을 첫장면으로 이동시켜놓고 리어로 하여금 죽기 직전에 자신이 저질렀던 실수의 본성을 돌이켜 보게 한다. 그리고 확실한 깨달음에 이른 리어는 극의 끝에서 다시 죽는다. 이 순환구조는 인간의 실존적인 상황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다. 무대는 교실이고 극의 형식은 포스트모더니즘연극의 주요 기호인 메타연극, 즉 「연극속의 연극」이다. 극의 중심주제가 「고통을 통한 인식」임을 생각할때 이는 적절한 고안이었다.
이 극에서 리어는 관객이면서 동시에 등장인물이다. 극은 리어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다른 등장인물들은 시종 무대를 떠나지 않고 리어의 회상과 필요에 따라 역을 입었다 벗었다한다. 또하나의 불행한 아버지인 글로스터와 리어만이 사실적인 분장에 사실적인 연기를 보일뿐 나머지 인물들은 동양연극의 양식적인 분장을 사용하면서 지극히 희화화된 연기를 수행한다. 연출자가 두 어리석은 노인들의 인식과정만을 사실적인 지평위에 놓았기 때문이겠다.
이 공연의 힘은 억제의 미학에서 비롯되는 격렬한 정서에 있었다. 이를테면 폭풍우 몰아치는 광야에서 리어가 노호할 때 음향효과는 마치 동굴속에서 한방울씩 떨어지는 석수처럼 아주 영롱하게 들리는 빗방울소리였다. 그 명증한 빗방울소리는 리어의 마음속의 태풍을 또렷하게, 그래서 더욱 아프게 그려줬다.
첫날밤공연에서 리어역의 카릴로 갠트너는 다소 경직되어 보이기는 했지만 탄력있는 목소리와 풍부한 표정으로 극에서 극에 이르는 감정의 격랑을 무리없이 탔다. 그러나 필자는 글로스터역을 맡은 아이언 스캇에게서 가장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남의 말을 잘믿는 어리석고 선량한 노인역을 한치의 과장도 없이 표현하면서도 극의 양식미를 전혀 깨뜨리지 않았다. 사다리, 바, 선을 사용하여 원숭이 우리같기도 하고 감옥, 터널 또는 미로같기도 한 배경을 창조한 존 베케트의 무대디자인 또한 리어의 인식에 이르는 험난한 여정의 배경으로서 뛰어난 기능과 미학을 발휘했다. 지성과 감성이 함께 빛났던 훌륭한 실험극이었다.<세종대 교수>세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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