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년4월 박 제네바대사 발언파문때/92년11월 미·EC 농산물분야합의때/올10월 일 조건부 쌀개방수용 결정때/최종과정서 정치논리에 의해 번번이 실패 정부가 그동안 쌀시장 개방이 불가피함을 공론화하려고 세번이나 시도했으나 번번이 무위에 그쳤던것으로 6일 밝혀졌다. 공론화가 시도될 때 마다 선거등 국내 정치여건이 미묘하게 얽히면서 좌절을 되풀이,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 대응실패가 정치논리에 의해 경제정책이 왜곡된 또 하나의 대표적 사례로 부각되고 있다.
경제기획원 농림수산부등 관계당국에 따르면 지금까지 ▲91년4월 박수길제네바대사(당시) 발언파문 ▲92년11월 미 EC(유럽공동체)간 농산물분야 합의 ▲올 10월중순 일본의 조건부 쌀개방 수용 결정등을 전후해 각각 세차례에 걸쳐 쌀개방 문제를 공론화하자는 의견이 정부내부에서 강력히 제기됐었다.
그러나 고위층에까지 보고된것으로 알려진 이같은 방침은 최종 논의과정에서 ▲내각제 시비등 정국불안과 북방외교 추진 ▲대선 유세 ▲정부출범후 첫 한미정상회담이라는 국내외 정치상황과 맞물려 무산되고 말았다는 후문이다.
쌀 개방 불가피성이 당국자 입을 통해 제기된것은 91년4월 박수길제네바대사(당시)가 UR협상대표로서의 솔직한 심정을 토로한것이 처음이다. 90년12월 농산물의 예외없는 관세화를 골격으로 한 둔켈안이 브뤼셀 통상각료회의(TNC)에서 채택되지 않자 가장 뚜렷하게 반대입장을 밝힌 우리나라는 국제협상 무대에서 일본과 함께 UR를 방해한 기피국가로 몰리는 판국이었다. 박대사는 기자회견에서 『UR협상 쌀부문은 모든 국가가 3∼5%씩 개방하는 선에서 타결될 가능성이 크다』며 『일본이 시장을 열 경우 우리도 불가피하다』고 밝혔었다. 그의 발언이 큰 파문을 일으킨것은 물론이다. 이때 기획원등 통상관계부처 실무선에서는 차제에 진상을 밝혀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심각한 「물밑검토」작업을 진행했었다. 하지만 그즈음 노태우 전대통령은 고르바초프 전소련대통령과 한소정상회담을 가진 직후였고 한중국교정상화작업이 비밀리에 추진되는 가운데 정치권에선 내각제 개헌의혹이 제기돼 쟁점화되고 있었다. 결국 이틀만에 노재봉총리가 국회답변에서, 최각규부총리는 긴급관계장관회의를 통해 각각 「기존방침 불변」을 재천명하면서 억지로 파문을 가라앉히고 말았다.
두번째 시도는 지난해 11월 오일시드(식용기름을 채취하는 씨앗류) 감산협상을 둘러싸고 미국과 EC가 첨예한 대립을 벌인 끝에 극적 합의(블레어하우스협정)에 이른 무렵. UR의 최대쟁점인 농산물분야에서 협상주도국인 미국과 EC가 극적 합의를 이룬 사실은 우리나라 입지를 뿌리째 흔드는 중대한 사태변화였다. 마침내 일본도 외무장관입을 빌어 『예외없는 관세화가 필요하다』고 입장을 수정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국내에선 대선의 지방유세가 본격화돼 쌀개방 불가방침이 모든 후보의 공약으로 서슴없이 발표되고 있었다. 최부총리는 최근 『전후 사정때문에 그 때를 놓친것이 지금도 안타깝다』고 회고했다.
마지막 기회는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정상회담을 눈앞에 둔 지난 10월중순께. 일본정부의 고위관계자들이 미국과 EC를 드나들며 쌀 부분개방에 거의 합의하고 있다는 정보가 포착되기 시작했을때였다. 더욱이 클린턴미행정부는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에 대한 하원비준을 얻어 UR의 연내 타결을 향해 기세를 올리는 입장이 됐었다. 이경식부총리는 4일 기자간담회에서 『사태가 어렵게 전개중인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새 정부출범후 첫 한미정상회담을 불과 며칠 앞둔 미묘한 시점이었다』고 밝혔다.
결국 경제정책 판단이 정치여건과 동떨어져 관철되기 어려운게 엄연한 현실이라는 지적이다. 그렇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국민의 눈과 귀를 속인 결과에 대해 이같은「변명」이 먹혀들지는 의문이다.【유석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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