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중심의 과학사 설파/인류의 진화서 유전자 연구까지/지성의 발달과정 다채롭게 서술 과학과 문학의 소질을 함께 갖고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브로노스키는 이 둘에서 다 성공했다는 점에서 드문 행운아이다. 폴란드에서 태어나 영국에 귀화한 그는 수학자·생물학자였고 시인 블레이크에 대한 권위자인데다 희곡작가이기도 했다. 나아가 그는 과학을 인문화함으로써 두 문화의 간극을 좁히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인간의 오름」은 인류의 문화적 진화의 원동력인 지성의 발달사이다. 예술·문학·종교·기술·건축등 광범한 내용을 담고 있으나 주종을 이루고 있는것은 아무래도 과학사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지은이는 역사·철학·과학이라기보다는 현대판 자연철학을 제시하는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이 여느 과학사와 다른 점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중심이라는것이다. 브로노스키는 자연이해의 궁극적인 목표가 인간성의 이해이며 자연 속에 인간이 처한 조건을 이해하는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의 글에는 인간의 위대한 정신과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넘쳐 흐른다. 그는 철저히 인간을 긍정하며 인간이 만든 과학에 대한 두터운 신뢰를 보인다.
「인간의 오름」은 인간의 진화에서 최근의 유전자 연구까지 다채로운 내용을 인류의 진보라는 줄기에 얽어맴으로써 독자들을 매료한다. 그가 다재다능한 현대의 르네상스인이 아니었던들 이런 일은 불가능했으리라. 따라서 이 책은 연대순 또는 분야별로 서술한 과학사 교과서와는 완연히 구별된다. 그러나 우리가 이 책을 읽고 감동을 받는것은 그의 비상한 재치보다도 인간에 대한 무서운 집념 때문이다.
브로노스키는 이 책에서 과학의 밝은 면을 보여주려 한다. 어두운 모습이 전혀 나오지 않는것은 아니다. 그는 나치의 등장과 과학자들의 대거탈출을 언급한다. 그러면서도 아리안물리학의 치욕적인 얘기는 들추어내지 않는다. 아우슈비츠의 대학살은 가스로 한것이 아니라 오만·교의·무지 때문에 일어난것이라고 한다.
원자폭탄의 개발을 건의했으나 그것을 일본에 쓰는데 반대했다가 실패한 실라르드의 얘기도 나온다. 과학자들의 발견이 파괴에 쓰인것은 과학자들의 비극이 아니라 인류의 비극이라고 한다. 하지만 원폭으로 폐허가 된 히로시마에서 과학과 인간의 가치를 생각한 브로노스키는 어디 갔는가?
절대적인 지식과 힘에 대한 욕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만 강조하기에는 과학의 위협은 너무나 크다.
「인간의 오름」은 본디 BBC TV 교양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진것이고 우리나라에서도 박성래교수의 해설을 붙여 거푸 방영되었다. 책도 원서가 나온지 3년만에 언론인 이종구씨가 「인간역사」라는 제목으로 축약번역했고 다시 9년 뒤에 재미작가 김은국씨가 완역했다. 번역판 「인간등정의 발자취」는 용어와 표기에 잘못된것이 많기는 하지만 유려한 글로 높은 문학적 향기를 잘 살려놓았다.
나는 1977년 BBC에 들러 그의 마지막 방송대본을 얻었다. 1987년 런던 하이게이트 공동묘지로 마르크스의 무덤을 찾았을 때 건너편 끝에 자리잡은 브로노스키의 아무런 장식없는 무덤을 발견했다. 과학이 날로 삭막해가는 이때 그토록 따뜻했던 휴머니스트가 이 세상에 없는것이 아쉽기만 하다.송상용 한림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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