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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공화국(김성우 문화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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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공화국(김성우 문화칼럼)

입력
1993.12.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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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이 불고 있다. 예사 바람이 아니다. 지금 이 나라에 시(시)의 바람이 불고 있다. 예사 조짐이 아니다. 이 조짐을 감지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시집의 홍수는 이미 오래전부터다. 이제는 시낭송 붐이다.

 금년들어 지난 10월, 11월 두달동안만해도 시낭송 행사가 곳곳에서 있었다.

 10월16일 국립극장. 분수대옆 광장에 야외무대를 가설해 놓고 「가을저녁의 시축제」가 열렸다. 이날 시낭송회는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시들을 한자리에 모은 것이 특징이었다. 생존 시인들은 본인들이 직접 나와 자기 시를 육성으로 읊었고 작고시인의 것은 국립극단 배우들이 낭송했다. 박두진시인의 「해」, 김남조시인의 「너를 위하여」, 조병화시인의 「해마다 봄이 오면」, 홍윤숙시인의 「오라, 이 강변으로」등이 교과서 책장에서 나와 관중의 다수를 차지한 청소년들에게 들려주어졌다. 이번 행사는 국립합창단, 국립발레단등 국립극장이 산하의 여러공연단체를 동원하여 시를 무대화했다는데 또다른 의미가 있었다.

 국립극장은 이제 시도 공연할 줄 알게 된것이다.

 10월18일 샘터파랑새극장에서는 꾸준히 시낭송운동을 계속하고 있는 문학아카데미의 시축제가 있었다.

 10월22일에는 한국시문화회관 주최로 동숭동 마로니에공원의 노천극장에서 시낭송회가 열려 성황이었다.

 11월들어 서울의 여러 구청들이 시운동을 벌이고 나섰다.

 11일 서대문문화체육회관에서 개최된 구민시낭송회에는 관내 거주 시인들과 구민들이 나와 자작시들을 읽었다.

 24일 서초구민회관에는 8백여명이 모였다. 서초구청과 강남교육구청이 공동주최한 시모임이었다. 많은 초청시인들이 참여했다. 예선을 거쳐 선발된 구민들의 시낭송 경연도 곁들였다. 구민인 김덕룡정무제1장관이 함형수시인의 「해바라기 비명」을 읊었고 구청장이 조지훈의 「승무」를 암송했다.

 26일 종로구청 강당의 장애인돕기 시낭송회는 이채로웠다. 재능시사랑어머니회가 마련한 이 행사에는 전국 각지에서 온 회원들이 참가했다. 이 어머니회는 주식회사 재능교육이 전국을 순회하며 펼치고 있는 주부시낭송콩쿠르의 입상자들 모임이다. 서울의 9개구와 부산·대구·광주·인천·울산·성남등지에 지회가 있고 회원은 총 4백여명에 이른다. 자꾸 늘려갈 예정이다. 이들은 반드시 시를 외워서 암송한다. 그 암송들은 어떤 배우의 낭송 못지 않고 노래자랑보다 더 심금을 울린다. 이렇게 시를 회중품으로 품고 다니는 주부들은 화장 없이도 아름답다. 그리고 시낭송으로 자선행사를 하겠다는 이들의 발상은 더욱 아름답다.

 이번에는 마침내 정치인들이 시를 들고 나왔다.

 지난주인 29일 민자당주최로 당사 옆인 여의도 중소기업회관에서 「시와 음악의 밤」이 개최되었다. 10명의 쟁쟁한 시인들이 초대되어 자작시들을 읽었다. 우체국 집배원, 회사원, 학교 교사등도 등단했다. 참석한 많은 국회의원들중 백남치, 박세직, 강인섭의원이 명시 또는 자작시를 낭송했다.

 이 자리에서 김종필 대표위원은 『정치에도 시가 있어야 한다』고 인사말을 했다. 참가시인의 한 사람인 김남조시인은 『정치인이 나라를 사랑하는 것만큼 시인도 나라를 사랑한다』는 말을 했다. 한 정당이 시행사를 마련하는것은 어느 나라에서도 드문 일이다. 시인만큼 이슬같이 맑은 마음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정치인이 된다면 그 정치에는 시가 있게 될 것이고 그러기 위해 정당이 시에 접근하려는 노력은 가상하다.

 지난 10월15일 저녁 전두환 전대통령의 연희동 사저에서 있었던 시모임이 또한 색다른 것이었다. 여러 시인들과 연극인, 음악인등 30여명이 모여 시를 낭송하고 시를 가곡으로 불렀다.

 최근 두달사이뿐도 아니고 또 서울만도 아니다. 학생들을 위해 서울시내 고등학교를 찾아다니며 시인들이 참여하는 낭송회가 수시로 열리고 있고 전국의 대소도시를 순회하는 어린이 시낭송 경연대회가 꾸준히 계속중이다. 각 지방마다 지역의 문인단체들이 시낭송회를 1년에 한두번은 반드시 연다. 서울에는 정기적인 모임이 여럿이고 시낭송전문 카페도 있다.

 우리나라는 이런 시의 나라다. 어느새 시가 이만큼 확산되어 있고 시운동이 자꾸 번져간다. 세계에서 가장 시를 사랑하는 나라라고 자부할만 하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 많은 나라는 부자가 많은 나라보다 언젠가는 강국이 된다고 자신해도 좋다.

 시는 모든 예술의 원점이다. 예술은 모든 문화의 본령이다. 시의 보급은 문화발전의 큰 동력이 된다. 우리의 시사랑속에는 문화적 도약의 진운이 있다. 문화대국의 장래가 보인다. 이 바람은 90년대 한국의 가장 두드러진 문화현상의 하나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이 시대의 파토스를 지켜나가야 한다.

 박두진시인은 그의 시 「시인공화국」에서 시인들만이 사는 나라를 꿈꾼다. 농부도 건축가도 공업인도 모두 시인인 나라에서는 도둑질도 증수회도 당파싸움도 없다. 그런데 「어디나 이 세상은 시의 나라가 아니다」라고 한탄한다. 반드시 모든 국민이 시인이 아니더라도 모든 국민이 시를 사랑하는 나라는 시인공화국이다. 어쩌면 이 나라가 시인공화국이 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자면 오늘 이 바람을 살려야 한다. 【본사상임고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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