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한국남극탐험대 현지보고/패트리어트 힐(남극)=손태규·윤평구특파원/영하30도 추위속 6일째 행군 “사기 충천” 가도가도 끝없는 눈과 얼음. 들리는것은 모자를 때리는 바람과 대원들의 거친 숨소리뿐이다. 하루 30㎞ 행군이 끝나면 나침반이 가리키는 남쪽하늘에는 지지않는 태양이 희뿌옇게 떠 있다.
한국일보 창간40주년기념 한국남극점탐험대의 도보탐험이 순조롭게 진행되고있다.11월 28일 하오9시 (한국시간)남극점탐험 전진기지 패트리어트 힐을 출발한 탐험대원4명이 탐험6일째인 4일현재 지나고 있는 지점은 출발점부터 1백50㎞지점이다. 탐험대와 베이스캠프와는 매2일마다 하오9시에 무전교신키로 했으며 10일간 교신이 불가능하게되면 곧바로 수색비행기를 보내기로했다. 출발첫날 교신에선 8시간 행군으로 좌표 남위 80도24분, 서경 81도18분위치에 도착했다고 알려왔다.
원정대는 서경 90도선상에 높은산들이 산재해있어 80도방향으로 1㎞천를 전진한후 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극점으로 향한다. 정확한 방위측정을 위해 정지위성망을 통한 위치파악계기인 GSP 2대,극지용으로 특별히 제작된 나침반을 비롯 가장 원시적이지만 확실한 해시계방향판을 제작해 사용하고있다.
이곳의 평균기온은 섭씨 영하10도로 춥지는 않으나 바람이 심해 한기가 뼈속을 파고드는듯하다.
허영호공격대장, 김승환 유재춘 홍성택대원의 사기는 어느때보다 높다. 등산선후배인 이들은 허대장의 명령에 절대복종이다. 아침8시에 출발, 하루 10시간을 걷는 강행군이 괴롭지만 일사불란한 팀웍 없이는 목표달성이 불가능함을 잘 안다.
남극탐험 성패의 왕도는 철저한 준비와 훈련도,장비의 우수성에 있지만 팀웍과 투지도 그에 못지 않은 요인이다. 숱한 영광과 비애로 점철된 남극탐험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남극·남극점 탐험역사/82년전 아문센 극점 “첫발”/스콧,한달차로 「최초정복」 자리 뺏겨
남극은 인간의 모험심과 도전의식을 가장 격렬하게 자극하는 곳이다. 아름다우나 잔인한 이 땅에는 죽음을 넘어선 탐험드라마가 수세기동안 간단없이 점철돼 왔다.
아문센, 스콧과 같은 탐험가의 시대이래로 남극점도달은 인간의 궁극적인 탐험목표였다. 지구의 가장 밑바닥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아무리 가혹한 자연환경이라도 제어하지 못했다.
남극의 존재를 가장 먼저 의식한 사람들은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었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았던 그들은, 이미 사람이 살고 있는 북쪽과 균형을 이루는 거대한 남쪽의 땅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1773년 영국의 제임스 쿡이 남극권을 건넘으로써 비로소 남극의 실재는 인간의 손에 잡히기 시작했다. 그는 남극에 상륙하지는 못했으나 남극의 존재를 확인했다.
드디어 1820년 1월 러시아의 탐험가 테데우스 벨링스하우젠은 남극을 찾아냈다. 이무렵 영국해군의 에드워드 브랜스필드도 남극을 찾아냈다. 누가 최초의 발견자인지는 여전히 논쟁거리다.
정작 남극에 맨 먼저 발을 디딘 사람은 호주로 이민간 노르웨이인 헨릭 불로 기록되고 있다. 고래잡이 업자였던 그는 1895년 동남극 케이프 에이데어에 상륙했다.
20세기가 열리면서 가혹한 조건을 이겨내고 남극을 정복하려는 영웅적인 탐험가들의 도전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생사를 건 탐험에서 영광과 비극의 주인공들이 명멸했다.
1902년11월 영국의 로버트 스콧, 에드워드 윌슨과 어네스트 쉐클톤이 극점에 도달하기 위한 최초의 시도를 했다. 이들은 5천를 전진, 남위82도에까지 이르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1908년에도 쉐클톤은 남극점 탐험에 나섰으나 겨우 1백80㎞를 남기고 배고픔때문에 돌아서야 했다.
남극점도달의 투쟁에서 최초의 승리자가 된 사람은 노르웨이의 로알 아문센이었다. 그는 1911년 12월14일 일행 4명과 함께 마침내 인류최초로 극점에 섰다. 인류가 남극의 존재를 깨닫고부터 무려 2천여년만의 일이었다.
바로 한달 3일뒤인 1912년 1월18일 스콧 역시 남극점에 도달했으나 아문센의 소식을 듣고는 실의에 빠져 버렸다.
그는 『최초라는 보상도 해주지 않고 그렇게 우리의 진을 뺀 이곳이야말로 정말 무서운 곳이다』라고 썼다.
스콧 일행 4명은 실의 속에 1천2백80㎞의 귀환길에 올랐으나 끝내 괴혈병, 동상, 영양실조로 모두 숨지고 말았다. 당시 두살이던 스콧의 아들은 팔순이 넘었으나 지금도 남극 환경보호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아문센의 성공소식을 들은 쉐클톤은 「최후의 위대한 여행」을 계획했다.
바로 최초의 남극횡단계획이었다. 그는 1915년 「엔듀런스」호를 타고 항해에 나섰으나 유빙에 부딪쳐 배가 부서지면서 야심찬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1922년 그의 죽음과 함께 영웅적 탐험시대는 막을 내리고 비행탐험등 기계화 탐험시대가 열렸다.
지금도 세계의 탐험가들은 끊임없이 남극점을 향해 도전하고 있다. 그리고 영토확장과 과학연구라는 새로운 남극탐험의 시대가 전개되고 있다.
1913년 2월12일 영국의 「더 타임스」는 스콧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이렇게 썼다.
『그의 탐험은 이 타락한 물질주의 시대에 아직 인간이 이상을 추구하며 어려움은 물론 죽음까지도 무릅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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