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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상해신보 「암살사건 보도내용」 발굴(개혁 풍운아 김옥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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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상해신보 「암살사건 보도내용」 발굴(개혁 풍운아 김옥균:2)

입력
1993.12.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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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정의 명 받아 반신 처단했소”/“나라위해 「큰해충」처치” 여한없다/잡혀온 범인 홍종우 당당·큰소리/상해 경찰선 “시신은 일주일후 배편에 실어보내라” 이번에 상해에서 발굴된 6건의 「신보」기사는 지금까지 발견된 자료 가운데 김옥균 암살사건의 전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다. 망명 정치가의 「골치아픈」암살사건을 둘러싸고 한청 양국 사이에 이루어진 공조체제와 한때 그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던 일본이 사건에 대해 취한 태도는 흥미로울 뿐 아니라 이 부분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요구하고 있다. 특히 민씨일파를 통해 조선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중국 정부 입장에서 김옥균을 단순히 권력을 탐한 역도로 매도하고 있는 보도태도는 비판받아야 하고, 일부 기사의 내용이 기존 연구서의 서술과 일치하지 않아 발굴된 자료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와 기존연구에 대한 재검토가 동시에 요구되고 있다.

 이를 위해 김옥균의 암살부터 홍종우의 석방까지 추적보도하고 있는 6건의 「신보」기사를 3회로 나눠 본 시리즈에 소개한다.【편집자주】

 <김옥균은 고려의 반신이다. 중국 광서 10년 10월17일, 고려 왕궁의 변은 홍식영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등이 김옥균과 함께 공모하여 사직을 위기에 빠뜨린 반란이었다…>

 1894년 3월30일자 청국 신보(2면)는「고려 반신 김옥균 암살에 대한 상보」라는 기사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홍식영」은 홍영식의 오식이다. 기사는 계속된다.

 <…반란이 평정된 후 홍식영은 사형당했고, 김은 박영효등과 일본으로 도주한 후 서양옷을 입고, 서양말을 하고, 이름을 바꾸어 서방 각국을 전전하다가 뜻밖에 홍종우에게 암살되고 말았다. 그러니 그런 불필요한 폭동이 무슨 이익이 있었겠는가!

 홍종우는 한성 사람으로 능히 여러 나라 말을 구사하고, 서양 옷을 잘 입었으며 독일, 불란서 등지를 돌아다닐 때, 김옥균과 만나면 거짓으로 친한 척 위장했다. 김이 일본 오사카로 돌아올 때, 홍도 함께 왔고 어느날 약속해서 세이케이마루 호를 타고 2월21일(화요일) 중국에 도착, 북하남로 동화객저에 묵었다…>

 「상해시 조계북로 80호」

 아무 간판도 없이 주소만 적힌 조그만 명패가 출입구 기둥에 붙어 있었다. 상하이 시립도서관 사서가 준 쪽지대로 서가회(상해시 고문서보관소)는 굳게 닫힌 문과 높다란 시멘트 담 뒤에 가려져 있었다.

 회색페인트 칠을 한 문을 밀자 인민복 차림의 노인이 수위실 앞에서 자전거를 고치다 말고 기자와 안내원 김매자씨(23)를 맞았다. 마당에 가득한 잡초와 퇴락한 일본식 2층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상하이 시립도서관이 「신보」 열람을 허락한 소개신(중국의 모든 국가기관은 이 소개장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다)을 제출하고 10여분이 지나자 40대 여직원이 두꺼운 종이에 싸인 1984년판 「신보」 영인본을 가져왔다.

 순간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김옥균의 암살현장인 뚱허양행 주변에는 아무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저 묵은 신문덩이에는 뭔가 건질 것이 있을 것인가 하는 기대와 불안이 빠르게 뒤섞여 지나갔다. 겉포장은 먼지투성이였다. 조심스레 날짜를 더듬어가다 한 순간 감격하고 말았다. 「김옥균」 이 거기에 있었다. 김옥균 암살사건이 9일에 걸쳐 상세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이틀 동안 낯선 하남북로 네거리를 별 소득없이 헤매고 다닌 우리는 도서관에 와 있다는 사실도 잊고 『와!』하는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김씨는 현대백화문이 아니고 고문이어서 기사를 제대로 해독할 수 없었지만 떠듬떠듬 읽어 내려갔다. 흥분된 마음을 누르고 1층 복사실에 가서 복사를 한 후 돌아왔다.

 정재서교수(이화여대 중국문학)는 이 기사들을 훌륭하게 번역해 주었다.

 <…김은 2층 1호실에 묵었고, 하인인 일본인 기타하라와 중국인 우푸런(오보인 호는 정헌)도 함께 있었다. 홍은 다른방에 투숙했었는데 이때까지도 김은 홍의 행동을 의심하지 않았다.

 여관 주인 길도덕삼이 무슨 일로 이곳에 왔는지를 김에게 물었고 김은 관광차 왔으며 이름은 암전화삼이라 속였고, 홍도 역시 상하이를 구경하기 위해 함께 왔다고 대답했다.

 이튿날 아침, 김이 양은(당시 청국 화폐) 5천원 짜리 수표를 꺼내 홍에게 소동문 밖 천풍전장에서 돈을 바꿔오라고 했는데 홍이 곧 돌아와 『천풍전장 주인이 마침 외출해 하오 6시나 돼야 돈을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시리즈 1에서 보도한 암살 장면 묘사는 생략).

 길도가 홍이 얼굴 빛이 급변하여 아래층으로 내려와 문을 급히 나가는 것을  보고 이상한 생각이 들어 위층에 올라가 보니 2층의 손님들은 이미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일본 영사관에 찾아가 보고를 하니 영사는 『이 일은 고려인들이 서로 싸우고 죽인 일이니 중국 관청에 알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길도가 다시 미국조계의 포방(경찰서)에 이 사실을 알리니 포두(서장)가 부하에게 『지보(당시 중국 마을 치안 담당관)를 도와 현에 알리라』고 지시했다.

 일본 영사는 의사 전호와 전구 두 사람을 데리고 현장에 도착했다.

 어제(29일) 아침 형사(영국조계 경찰)가 오송의 한 여관에서 홍을 붙잡아 사건현장으로 데리고 왔는데 그의 트렁크 속에는 많은 서양옷과 서양 각국 사람들과 주고 받은 편지들이 나왔다. 그의 행동거지를 보건대 고려의 하층민은 아닌 것 같았다.

 29일 11시30분께 상하이현 황애당대령이 형리들을 대동하고 뚱허양행에 도착했고 일본부영사 산좌원차랑, 통역 가등의삼과 속수일공 그리고 영국 군함의 한 통령, 맥 영국조계 경찰서장, 여 미국조계 경찰서장 등이 각기 일행을 이끌고 왔다.

 황대령이 먼저 길도를 조사했다. 『죽은자가 김옥균인가』 『맞습니다』 『병사인가, 피살인가』 『홍종우에 의해 피살됐습니다』 『김과 홍은 원수사인가』 『모르겠습니다. 그들이 같은 배로 와 투숙한 사실만 압니다』

 대령이 기타하라에게 질문을 돌렸다. 『당신은 암전이 김옥균인줄 알았는가』 『모릅니다. 다만 그가 일본에 있을 때 이름은 주작이라 했으며 이곳에 와서는 다시 화삼이라고 개명했습니다』

 대령이 형리를 시켜 시체를 조사하게 했다. 형리가 시신의 옷을 벗기고 자세히 살펴본 뒤 『총에 맞아 숨졌다』고 말했다.

 그때 영국조계 서장이 부하를 시켜 홍을 대령 앞에 데리고와 신문했다.『당신은 왜 그를 쏘았는가』 『이따위 대역무도한 인간은 모든 사람이 잡아죽일 것이오. 만약 이 자가 고려에 멋대로 돌아가도록 한다면 그 세력이 반드시 난리를 일으킬 것이오. 그래서 쏘아 죽인 것이오』 『살인자는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가』 『알고 있소. 나라를 위해 이런 큰 해충을 처치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소』 『어떻게 그가 김옥균인줄 알았는가』 『확인해 보시오, 틀림없소. 이번 일은 고려 조정의 명을 받들어 반신을 처단한 것이오』 『모두 몇 발을 쏘았는가』 『다급하고 손이 떨려 몇 발을 쏘았는지 알 수 없소』 『흉기는 어디에 있는가』 『도망갈 때 강물에 버렸소』 

 목격자들은 『홍의 인상이 당당하고 의복이 점잖으며 언사가 분명하고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고 말했다.

 대령이 통역인 속수에게 『이 사건이 정말 고려왕이 홍을 시켜 저격한 것이라면 홍은 무죄일 뿐 아니라 공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어째서 사전에 조회(외교적 절차)도 없이 왔으며 조정에서 발급한 증명서 하나 없는가. 일단 원한에 의한 살인으로 보고 조사와 신문을 계속해 봐야 하겠다. 김의 시신은 오늘 서둘러 염을 해야하고 일주일 뒤에 배 편에 실어보내도록 하자』고 말했다.

 기타하라가 토요일 아침 세이케이마루호가 출발할 때 그의 시신을 싣고 돌아갈 의사를 밝혔으나, 대령은 허락하지 않고『그러기 위해서는 내일 정오까지 본 현의 공문이 일본 영사관에 도착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대령이 산좌, 가등, 속수 등과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시체의 머리 맡에는 향을 피워놓고 냉수 한 사발을 놓았다. 그것은 중국의 풍속이었다>【상하이=서사봉특파원】

◎“혁명지원받으러 상해로 가자” 유인(미운오리 김옥균 죽이라:중)

 암살계획에 합의한 이일식과 홍종우는 동경시 지포해수욕장 근처에서 은거하던 김옥균을 수시로 찾아가 자신들이 「우호적이고 쓸만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김옥균은 항상 그들의 거동을 의심했다. 사람들을 만나면 『이일식과 홍종우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하곤 했다.

 이 불신을 전해들은 이일식은 의혹을 풀어줘야 암살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판단해 기회를 엿보던 중, 김옥균을 독대한 술자리에서 절호의 기회를 만난다.

 술잔이 몇차례 돌아 얼굴이 불그레해진 김옥균에게 이일식은 『나도 조선정부의 현 정체로는 나라가 잘 될 수 없다고 생각해온 사람입니다. 가능하면 빨리 혁명이 단행되길 바라고 있습니다』라고 짐짓 열변을 토했다.

 한 순간도 긴장을 풀지 않던 망명객 김옥균이 어느 정도 경계를 늦추자, 이일식의 암살계획도 2단계로 접어들었다.

 때로는 기밀사항도 들을 수 있게된 이일식은 1894년 1월 김옥균의 집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던 끝에 능청스런 질문을 던졌다.

 『혁명에는 좋은 방략이 있어야 하고, 혁명을 이끌 힘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 가 가진 힘은 무엇입니까』

 김옥균을 일본에서 살해하면 일본에 체류중인 나머지 개화파 요인에 대한 암살계획이 뒤틀릴 수 있다고 판단한 이일식의 교활한 흉계였다.

 김옥균이 이일식에게 어떤 방책이 있냐고 되묻자 『혁명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믿을 만한 강대국의 뒷받침이 있어야 하는데 저는 청국에서 14년간 살아서  이홍장의 아들 이경방을 잘 알고 있습니다. 청나라로 건너가 이경방의 주선으로 이홍장을 만난 다음 그로부터 지원을 약속받으면 일이 순조롭게 풀릴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김옥균이 그의 말을 전부 믿은 건 아니었지만, 가난과 냉대 속에 지속해온 10년간의 일본생활에서 더이상 기대할것이 없고 이홍장을 만나면 그를 설복시킬 수 있다는 자신이 섰다.

 3월25일 고베(신호)항에는 홍종우, 기타하라, 우푸런과 함께 상하이행 세이케이마루호에 오르는 김옥균의 모습이 보였고, 그에게 5천원짜리 가짜 수표를 쥐어 준 이일식이 뒤에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김옥균 연보

▲1851년 2월 23일 충청 공주군 정안면 광정리에서 출생

▲1856년 종숙 김병기의 양아들이 되어 서울로 이주

▲1867∼72년 오경석 박규수 유홍기로부터 개화사상 전수

▲1872년 문과에 장원급제, 북경방문

▲1884년 12월 갑신정변 거사 후 일본으로 망명

▲1886년 지운영의 김옥균 암살미수. 오가사와라(소립원)섬으로 추방

▲1888년홋카이도  유배

▲1890년 도쿄로 압송

▲1894년 3월 자객 홍종우와 함께 도청 후 암살됨. 4월14일 서울 양화진에서 능지처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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