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숙 근작 「차임벨이 울릴때」 등 문학의 위력과 아름다움에 대한 믿음을 강화시켜주는 문학이 출현하기를 우리는 늘 고대한다. 그런 문학은 기성작가의 부단한 쇄신에 의해서 창조될 수도 있고 새로운 작가의 참신한 작업에 의해서 창조될 수도 있다. 기쁘게도 우리는 최근 그런 신인을 발견했다. 그는 단편소설 「차임벨이 울릴때」(「실천문학」 가을호), 「별이 지는 길섶」(「샘이 깊은 물」 11월호)등을 잇달아 발표한 박형숙이다. 이 작품들을 통해 그는 우리 소설의 위력과 아름다움에 대한 믿음을 강화시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차임벨이 울릴 때」의 주인공은 「변두리 학교」의 임시교사이다. 그는 6개월 시한의 교사인지라 여느 교사마냥 강한 책임감과 당당한 자세로 교육에 전념하지 못한다. 그가 비교적 학교에서 소외된 몇몇 사람들과 느슨한 유대를 맺고 있을 뿐 대다수의 교사들이나 학생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것은 그 교사가 「곳곳에 금이 가 있는」 그 학교에서 이방인이나 다름 없다는것을 잘 보여준다. 「차임벨…」은 바로 이런 이방인의 불안한 내면세계와 갑갑한 학교생활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별이 지는 길섶」은 대학을 중퇴한 뒤 실업상태에 있는 여성의 피곤하고 울적한 일상을 조명하고 있다. 그 여성은 결핵을 앓은 적이 있고 자주 기침을 하는 육체적으로는 허약한 여성이나 사회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를 열망하며 6월항쟁에 깊숙이 참여할 정도로 정신적으로는 강한 여성이다. 그러나 그는 그 강한 정신을 계속 유지하지 못한다. 그는 사회적 격변의 와중에서 고뇌하다가 그 고뇌를 이론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제때에 수습하지 못한 채 대학을 떠난다. 그의 주변 인물들의 사정도 썩 좋지 못하다. 그의 가족은 가난 속에서 짜증스럽게 살고 있고 그의 애인은 운동권학생으로서 노동현장에서 활약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차임벨이 울릴 때」와 「별이 지는 길섶」은 서로 다른 세계를 그리고 있는듯이 보인다. 전자의 주요 공간이 학교이고 후자의 주요 공간이 산동네에 있는 가정과 공단의 길섶이라는 점, 전자의 주인공이 대학을 마치고 교사자격증을 갖고 있으나 후자의 주인공은 대학을 도중하차하고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아르바이트나 겨우 하고 있다는 점등은 이를 뒷받침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은 그런 이질성 못지 않게 동질성을 많이 보이고 있다. 전자의 주인공이나 후자의 주인공은 다같이 8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녔다. 그들은 현실의 어두움을 투시할 수 있는 눈을 지닌 탓에 대학을 무사히 졸업하는것 자체를 자랑스럽게 여기기보다 부끄럽게 여긴 젊은이들이다. 그런 젊은이들에게 허용되는 길이란 그리 넓지 못하다. 더욱이 그들은 가난을 유일한 재산으로 상속받은 박복한 젊은이들이라 적절한 탈출구를 찾지 못한다. 시련과 절망이 그들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 두 소설에 음산한 분위기가 시종일관 감도는것도 그 때문일 터이다.
이처럼 박형숙의 근작소설들은 불우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세상의 어두움을 읽을 줄 아는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발휘하고 소신을 피력할 수 있는 일거리를 구하지 못하여 배회하는 모습을 섬세한 문체와 차분한 어조로 조형하고 있다. 이를 통해 박형숙은 차가운 환경 속에 갇혀 있는 양심적이고 재능있는 젊은이들의 현주소와 초상을 정직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묻는다. 이들은 그 차가운 환경에서 구출할 「햇살」은 어디에 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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