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취재진,당시 사건보도 「신보」 발굴/이홍장이 수사조기종결 지시/조선관리도 차례 무마방문/학계 “사건연구 결정적사료” 흥분 청국정부가 임오군란 직후 대원군을 납치했던 이홍장을 통해 김옥균 암살사건의 축소조작에 개입했으며, 조선정부 역시 암살자 홍종우의 무죄 석방을 위해 관리를 파견하는등 사건처리에 직접 개입한 사실이 1백년만에 처음 밝혀졌다.<관련기사 11면>관련기사 11면>
갑신정변(1884년)의 중심인물인 김옥균은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실패한 뒤 일본에 10년간 망명하다 재기를 꿈꾸며 중국 상하이로 간 그 이튿날 암살당했다. 암살과 관련된 새로운 사실들은 1894년 상하이 뚱허양행 암살사건을 상세하게 추적보도한 당시 청국 신문기사들이 처음으로 발굴됨으로써 확인됐다.
본보 취재진은 최근 상하이 시립도서관 부속 고문서보관소인 서가회(상해시 조계북로 80호)에서 김옥균 관계자료를 취재하던 중 이「신보」기사들을 찾아냈다. 신보는 당시 중국의 최대신문이었다.
이 기사들은 김옥균이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된 날로부터 이틀 뒤인 1894년 3월30일부터 4월7일까지 암살당시의 정황, 홍종우의 검거경위, 그에 대한 경찰의 심문내용, 사건해결을 위한 조선·청국 양국정부의 협조, 암살범 홍종우의 석방경위등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은 사건의 전말을 생생하게 추적보도하고 있다.
「홍종우에 얽힌 일화」라는 제목의 4월3일자 신보는 이홍장이『반신은 이미 주살되었으니 홍종우 짐 속에서 발견된 모든 서신들에 대해서는 깊이 조사할 필요가 없다. 이 사건에 무고한 사람들이 연루되는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라는 전보를 쳐 수사의 조기종결을 지시한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또 이 기사들은 조병식을 비롯한 2명의 조선대신이 두차례에 걸쳐 상하이에 파견돼 『김옥균은 국가의 반신이고 그를 암살한 홍종우는 무죄일 뿐 아니라 공로자』라는 조선정부의 입장을 섭 상하이 관찰사에게 전달하고 사건처리를 협의한 사실도 보도하고 있다.
이 기사들은 「고려반신 김옥균 암살에 대한 상보」(3월30일자 2∼3면) 「고려 반역자 김옥균 피살 비화」(3월31일자 3면) 「김옥균 도당 모반사건에 대한 해설」(4월1일자 1면) 「고려관헌 상하이경찰서에 오다」(4월2일자 3면) 「홍종우에 얽힌 일화」(4월3일자 3면) 「고려관리 상하이에 오다」(4월7일자 3면)등으로 계속되고 있다.
학계는『김옥균의 암살사건에 대한 연구는 절대적인 연구사료의 부족으로「공백」으로 남아있다』며 이 기사자료들을 매우 귀중한 사료로 평가하고 있다.
신용하교수(서울대)는『지금까지 김옥균암살에 대한 연구는 시신이 청국 지원하에 한국으로 후송됐다는 결과만 밝히고 있을 뿐 암살사건 전반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라며『발견된 기사들은 김옥균 암살사건의 연구에 결정적인 자료가 될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이 자료들은 김옥균암살이 홍종우 개인의 출세욕에 의한 단독사건이 아니라 한 중 일 세 나라의 음모가 개입된 국제적 사건임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이광린중부대학장도『김옥균의 암살에 대한 연구는 당시에 조성된 한 중 일의 복잡한 역학관계를 반영하는 대단히 중요한 사건임에도 소홀히 취급돼 왔고, 당시의 중국측 자료가 검토된 적이 없기 때문에 이번 발굴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평가했다.【상하이=서사봉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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