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아픔그려 생명애착 표현/30년대 「와사등」 80년대「임진화」 등 남겨/사업가로도 두각 불구 “시인으로 불러다오” 23일 타계한 김광균씨는 모더니즘의 시, 그중에서도 이미지즘의 시를 우리의 언어로 정착시킴으로써 우리의 시에 대한 현대적 감수성을 한 단계 끌어올린 시인이라고 말할수 있다. 현대시사에 큰 족적을 남긴 그는 초기 대표시집「와사등」(1939년)부터 노년의 「임진화」(1989년)에 이르기까지 도시의 상실적 정서를 애상적으로 그려낸 모더니즘 시인이다. 그의 시는 도시적 정서의 모더니즘 시 중에서도, 언어의 회화적·시각적 효과를 중시했던 이미지즘의 시로 평가된다.
아스팔트와 고층빌딩 등 물질문명을 함축한 도시에 대해 「존재의 소멸」을 예감했던 그는 애상이라는 농도 짙은 서정을 통해 생명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여주었다.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긴―여름해 황량히 나래를 접고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 늘어선 고층 창백한 묘석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 무성한 잡초인양 헝클어진채 사념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 (「와사등」중에서)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도시는 나에게 사막같은것이다 봄빛 새어오는 가로수 밑을 서성거리며 친구와 씁쓸한 인생을 이야기 할때 내 귀에는 사구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가 들린다 …> (사막도시, 1986) 도시는 나에게 사막같은것이다>
김기림이 모더니즘의 이론을 도입했다면 그는 이것을 작품으로 구현했다. 젊은 시절의 회화적 색채의 시어가 노년에는 바람 부는 모래밭 같이 황량한 풍경으로 대치되기는 했지만 도시적 감각이 배어 있는 시각적 이미지는 그가 평생 간직한 시적 본령이라고 볼수있다.
1914년 경기 개성에서 출생한 그는 26년 「중외일보」를 통해 등단했다. 김기림이 표방한 모더니즘에 심취한 그는 36년 「시인부락」, 37년「자오선」의 동인으로 참가하며 왕성한 시작활동을 벌였다. 시집 「와사등」「기항지」등이 발표되자 그의 명성은 우리 시단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보인 시인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그러나 그는 64년 세번째 시집 「황혼가」를 낸 일 외에는 한동안 문단에서「행방불명」됐다. 6·25때 납북된 동생의 사업을 맡아 사업가로서 외도를 했던것이다. 「건설실업」을 운영해 온 그는 한국경제인 연합회 이사등을 역임하면서 경제계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한시도 시인임을 잊지 않았다』고 말했던 그는 86년과 89년에 시집「추풍귀우」,「임진화」를 발표해 노시인의 열정을 보여 주었다. 그는 병상에서 쓴 시 「해변가의 무덤」으로 제2회 지용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88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그는 성북동 자택에서 그 동안 못했던 시작에 열중했다. 그는 『기업을 한것은 생활의 방편일 뿐이었다. 내가 죽은 뒤에는 시인으로 기억하고 불러 주면 고맙겠다』고 말하곤 했다.【김철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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